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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통합·여성인권 ‘거목’ 프랑스 정치가 시몬 베이유 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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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통합·여성인권 ‘거목’ 프랑스 정치가 시몬 베이유 타계


1974년 보건장관 재직 당시 시몬 베이유. AFP/연합뉴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뒤 유럽의회 의장까지 오른 프랑스의 여성정치가 시몬 베이유가 30일(현지시간) 타계했다. 향년 89세.

베이유의 아들인 장 베이유 변호사는 "오늘 아침 자택에서 9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다"고 프랑스 언론들이 전했다.

베이유는 프랑스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인물 상위 리스트에 꼽힐 만큼 존경받는 여성 정치가다.

무엇보다 프랑스에선 40여년 전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를 주도해 여권을 신장시키고, 나치의 대학살(홀로코스트)을 피해 생존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 통합에 헌신한 정치가로 기억된다.

1927년 니스에서 태어난 베이유는 10대 청소년 때이던 1944년 가족들과 함께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로 끌려갔다. 부모와 오빠가 모두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베이유와 다른 두 자매는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았다.

수용소로 끌려간 뒤 자유를 찾아 나서는 가시밭길 여정을 담은 자서전 '삶'은 2007년 출간돼 프랑스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이 책에는 남프랑스 니스에서 유복하게 자라던 베이유가 프랑스의 나치 괴뢰정권이었던 비시(Vichy) 정부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추방돼 겪은 고초와 수용소 관리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뒷얘기가 담겨 있다.

베이유는 2010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학술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종신 회원으로 선출된 뒤 연설에서 "아우슈비츠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생각한다"면서 "부모님은 언제나 나의 곁에 계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여러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 나치 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경험 때문에 유럽통합론자가 됐다고 회고했다.

베이유는 1979년부터 3년간 초대 유럽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며 유럽의 평화를 위해 강력한 유럽연합(EU)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통합 노력에 힘썼다.

유럽 통합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국내에서는 수감자들의 인권과 여권 신장을 위해 뛴 페미니스트이자 인권 법률가로 이름을 떨쳤다.

파리정치대학원과 국립사법학교를 졸업한 뒤 법관으로 활동하면서는 프랑스 교정시설의 열악했던 인권 상황 개선에 진력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한 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에게 발탁돼 중도파 내각에서 보건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직시절인 1974년 베이유는 낙태 합법화를 주도했다. 4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이 법은 그의 이름을 따 '베이유 법'(Loi Veil)으로 불리며 프랑스에선 시몬 베이유와 낙태 합법화를 동일시해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1994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부인과 시몬 베이유(오른쪽). AP=연합뉴스
당시 하원은 25시간의 격론 끝에 낙태 합법화 법안인 베이유법을 통과시켰는데 이에 반대하는 일부 동료 남성의원들은 낙태를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에 비유하는 등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기도 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언론인 알랭 뒤아멜은 이날 RTL 방송에 출연해 "낙태 합법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의원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서 있던 베이유 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당시 남성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돌이켜보면 미친 짓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베이유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외 정치지도자들은 잇따라 애도 성명을 내고 고인을 추모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트위터에 "프랑스인들에게 베이유 여사는 사표(師表)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프랑스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인물을 본다"고 애도했고,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그는 우뚝 선, 인간적인, 관대한 조국의 얼굴로 남을 것"이라며 "프랑스는 오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을 잃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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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4년 보건장관 재직 당시 시몬 베이유. AFP/연합뉴스
1974년 보건장관 재직 당시 시몬 베이유. AFP/연합뉴스
2차 세계대전 당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끌려갔다가 살아 돌아온 뒤 유럽의회 의장까지 오른 프랑스의 여성정치가 시몬 베이유가 30일(현지시간) 타계했다. 향년 89세.

베이유의 아들인 장 베이유 변호사는 "오늘 아침 자택에서 90세 생일을 며칠 앞두고 어머니가 숨을 거두셨다"고 프랑스 언론들이 전했다.

베이유는 프랑스의 각종 여론조사에서 가장 존경하고 신뢰하는 인물 상위 리스트에 꼽힐 만큼 존경받는 여성 정치가다.

무엇보다 프랑스에선 40여년 전 프랑스에서 낙태 합법화를 주도해 여권을 신장시키고, 나치의 대학살(홀로코스트)을 피해 생존한 경험을 바탕으로 유럽 통합에 헌신한 정치가로 기억된다.

1927년 니스에서 태어난 베이유는 10대 청소년 때이던 1944년 가족들과 함께 나치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로 강제로 끌려갔다. 부모와 오빠가 모두 수용소에서 목숨을 잃었고, 베이유와 다른 두 자매는 우여곡절 끝에 살아남았다.

수용소로 끌려간 뒤 자유를 찾아 나서는 가시밭길 여정을 담은 자서전 '삶'은 2007년 출간돼 프랑스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는 스테디셀러다.

이 책에는 남프랑스 니스에서 유복하게 자라던 베이유가 프랑스의 나치 괴뢰정권이었던 비시(Vichy) 정부에 의해 아우슈비츠로 추방돼 겪은 고초와 수용소 관리의 도움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던 뒷얘기가 담겨 있다.

베이유는 2010년 프랑스 최고 권위의 학술기관인 아카데미 프랑세즈의 종신 회원으로 선출된 뒤 연설에서 "아우슈비츠에서 돌아가신 부모님을 6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매일 생각한다"면서 "부모님은 언제나 나의 곁에 계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생전에 여러 인터뷰에서 유년 시절 나치 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갔다가 살아남은 경험 때문에 유럽통합론자가 됐다고 회고했다.

베이유는 1979년부터 3년간 초대 유럽의회 의장으로 활동하며 유럽의 평화를 위해 강력한 유럽연합(EU)이 필요하다는 신념으로 통합 노력에 힘썼다.

유럽 통합에 본격적으로 나서기 전 국내에서는 수감자들의 인권과 여권 신장을 위해 뛴 페미니스트이자 인권 법률가로 이름을 떨쳤다.

파리정치대학원과 국립사법학교를 졸업한 뒤 법관으로 활동하면서는 프랑스 교정시설의 열악했던 인권 상황 개선에 진력했다.

이후 정계에 입문한 뒤 발레리 지스카르 데스탱 대통령에게 발탁돼 중도파 내각에서 보건장관에 올랐다.

장관 재직시절인 1974년 베이유는 낙태 합법화를 주도했다. 40여 년이 넘은 지금도 이 법은 그의 이름을 따 '베이유 법'(Loi Veil)으로 불리며 프랑스에선 시몬 베이유와 낙태 합법화를 동일시해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1994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부인과 시몬 베이유(오른쪽). AP=연합뉴스
1994년 힐러리 클린턴 당시 미국 대통령 부인과 시몬 베이유(오른쪽). AP=연합뉴스
당시 하원은 25시간의 격론 끝에 낙태 합법화 법안인 베이유법을 통과시켰는데 이에 반대하는 일부 동료 남성의원들은 낙태를 나치의 유대인 학살(홀로코스트)에 비유하는 등 모욕적인 언사를 퍼붓기도 했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언론인 알랭 뒤아멜은 이날 RTL 방송에 출연해 "낙태 합법화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의원들로부터 모욕을 당하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서 있던 베이유 여사의 모습이 떠오른다"며 "당시 남성들의 무지와 어리석음을 돌이켜보면 미친 짓처럼 여겨진다"고 말했다.

베이유의 타계 소식이 알려지자 국내외 정치지도자들은 잇따라 애도 성명을 내고 고인을 추모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은 트위터에 "프랑스인들에게 베이유 여사는 사표(師表)였다. 우리는 그에게서 프랑스가 성취할 수 있는 최고 수준의 인물을 본다"고 애도했고, 에두아르 필리프 총리는 "그는 우뚝 선, 인간적인, 관대한 조국의 얼굴로 남을 것"이라며 "프랑스는 오늘 역사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인물을 잃었다"고 말했다.

베이유를 내각에 발탁했던 지스카르 데스탱 전 대통령도 성명을 내고 "그는 인생 최고의 기쁨과 슬픔을 모두 경험한 매우 특별한 여성이었다"고 말했다.

장클로드 융커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은 "고인은 갈가리 찢긴 유럽으로 고통받으신 분으로 정계 입문 뒤에는 유럽에서 항구적 평화가 정착되도록 하는 데 힘쓰셨다"며 베이유의 유럽통합 노력에 경의를 표했다.

일간 르몽드는 '시몬 베이유, 남성의 세계에서 여성의 자유를 말하다'라는 제목의 부고 기사에서 고인을 "아우슈비츠의 생존자, 여권 진보의 상징, 유럽 통합의 인물이었다"고 평가했다. 유족으로는 2013년 별세한 앙투완 베이유와 사이에 둔 세 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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