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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트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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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드레 바쟁과 미장센
Andre Bazin & Mise-en-Scene

   앙드레 바쟁은 프랑스 태생의 영화 비평가로서 세르게이 에이젠쉬테인의 형식주의적 영화 이론에 반하는 리얼리즘 영화 이론을 펼친, 지금까지 가장 영향력 있는 영화 이론가이다. 2차 대전 이후부터 영화 평론을 시작했으며 1951년 [까이에 뒤 씨네마]라는 잡지를 발행하면서 본격적으로 자신의 이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또한 이 잡지에서 함께 활동했으며 자신의 제자였던 프랑스와 트 뤼포와 끌로드 샤브롤, 장-뤽 고다르 등은 1960년대에 세계를 풍미한 누벨 바그 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누벨 바그는 바쟁과 트 뤼포를 중심으로 작가주의 이론을 내세우며 과거에 묻혀졌던 훌륭한 감독들을 재발굴한다.

   영화에서 사실성을 중시한 바쟁은 의도적인 방법과 기술 즉 인위적인 조명, 셋트, 편집 등을 동원하여 영화의 의미를 전달하 려는 것에 반대한다. 그는 꾸며진 상징성 및 몽따쥬를 현실을 그대로 보여 주지 않고 조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 전함 포템킨 Bronenosets Potymkin>류의 러시아 형식주의 영화나 <칼리가리 박사의 밀실 Das Kabinett des Dr.Caligari > 등의 독일 표현주의 영화에 대해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그는 "모든 예술은 인간의 개입을 전제로 하고 있지만 오직 사 진만이 인간의 마음을 배제한다. 사진은 자연 속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꽃이나 눈송이와 같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연을 그대로 느 끼도록 만든다."고 이야기했다. 영화에서의 편집이나 인위적인 조명 역시 인간의 개입이라고 여긴 것이다. 따라서 바쟁의 영화론은 인간의 개입 없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 주는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게 된다. 그는 몽따쥬에 의한 영화대신 미장센 에 의한 영화나 다큐멘터리 식의 사실성을 강조한 영화들을 중요시했다. 미장센이란 '사건을 무대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연극 용 어이다. 영화에서 미장센은 단일한 쇼트 shot 또는 테이크 take, 곧 카메라가 장면을 찍기 시작하여 멈추기까지의 시간 동안에 화면 속에 담기는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작업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는 장 르느와르나 오손 웰즈,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영화들에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영상을 발견했다. 장 르느와르 와 오손 웰즈의 영화는 치밀한 구성으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공간의 깊이감이라고 이야기하는 ㄷ 포커스 deep focus와 짧게 편 집하지 않고 보여주는 롱 테이크 long take로 영화를 이룬다. 웰즈의 <시민 케인 Citizen Kane>과 르느와르의 <게임의 규칙 La Regle du Jeu>은 그러한 예를 훌륭히 보여 준다. 그리고 안드레 바쟁은 네오-리얼리즘에 나타난 '영화 속의 현실감' 을 높이 평가한다. 네오-리얼리즘의 영화들은 현지에서 직접 촬영되었기 때문에 조명을 거의 쓰지 않았고, 비직업 배우가 출연하 여 영화에 생생한 사실감을 불어넣었다. 또한 그들은 전후 이탈리아의 처참한 현실을 보여 주기 위해 편집보다는 장시간 촬영에 의존했다. 이것은 바쟁이 중시한 리얼리티를 충실하게 재현해 낸 것이다. 이런 바쟁의 견해는 사실주의 영화 이론으로 명성을 얻 었다.

   하지만 사진적 이미지가 사실적인 효과를 낸다고 믿었고 그 때문에 사실주의 영화 이론을 편애했던 바쟁의 이론이 지금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인정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사진도 조작이 가능하고 다큐멘터리 영화나 사실주의 영화에도 만드는 사람의 개입 이 이루어질 수 있다. 소재가 왜곡될지라도 사실성만 지니고 있으면 된다는 그의 시각은 현재에는 많은 의문점을 남겨준다.

   또한 현재에는 몽따쥬를 강조한 에이젠쉬테인의 이론을 바쟁이 주장한 사실주의적 영화 언어가 동시에 고려되는 영화가 만들 어지고 있기 때문에 초기의 영화 이론이라고 할 수 있는 바쟁의 이론을 전면적으로 수용해서 영화를 만들지는 않는다. 하지만 바 쟁의 영향은 아직까지 다양한 감독과 영화 이론에 미치지 않는다. 비록 바쟁의 이론에 직접적인 토대를 두고 있지 않더라도 미장 센을 자신의 중요한 영화 형식으로 발견하고 실현한 감독들은 르느와르와 웰즈를 비롯하여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잉마르 베르 히만 등이 있다. 이들은 현대 영화에 자취를 남긴 위대한 감독들로 평가받고 있다.





누벨 바그
Nouvelle Vague

   누벨 바그라는 명칭은 1958년 [렉스프레스]지의 여기자가 당시 새롭게 데뷔한 감독들을 '새로운 물결 Nouvelle Vague'이라 지 칭하면서 영화계에 등장했다.

   누벨 바그는 장-뤽 고다르, 프랑스와 트뤼포, 끌로드 샤브롤, 에릭 로메르, 자끄 리베트 등을 중심으로 일어난 영화적 흐름으 로 알랭 레네, 아네스 바르다, 로제 바딤, 루이 말 등 세느 좌안파(左岸派) 감독들의 영화를 포함하기도 한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씨네마떼끄 프랑세즈에서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에서부터 헐리우드 B급 영화까지 그야말로 영화史를 섭렵 하면서 지금까지의 영화사를 새롭게 해석하고 교과서적인 영화보다는 앞으로 프랑스에서 나아갈 영화에 대해 논의하였다. 씨네마 떼끄 프랑세즈가 누벨 바그 감독들의 공간적 토대가 되었다면 앙드레 바쟁과 [까이에 뒤 씨네마]는 이들의 이론을 발표할 수 있 는 장이 되었다.

   프랑스와 트뤼포는 1954년 [까이에 뒤 씨네마] 1월호에서 '프랑스 영화의 어떤 경향'이라는 논문을 통해 감독의 창조적 개성 을 반영한 영화가 진정한 영화이고 영화 속에서 꾸준히 탐구하는 일관적 주제를 갖는 사람을 '작가 Auteur'로 규정하여 영화계에 '작가주의 Politique des Auteur' 논쟁을 불러 일으켰다. 작가주의는 누벨 바그 감독들이 영화를 만드는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기성 세대를 비판하는 도구로 사용되었으나 영화의 여러 측면 중에서 주제와 스타일만을 중시했고, 작가라는 기준이 편견에 치우 칠 수 있다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프랑스와 트뤼포의 <400번의 구타 Les Quatre Cents Coups>, 장-뤽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A Bout de Souffle > 그리고 알랭 레네의 <히로시마, 내 사랑 Hirosima, Mon Amour>이 모두 같은 해('59년)에 발표되어 이론으로만 영화를 평가하던 사람들이 실제에서도 이론 못지 않은 위력을 발휘했다. 가장 대표적인 누벨 바그 감독은 트뤼포와 고다르이다. 트뤼포 는 앙뜨완느 드와넬이라는 인물의 성장에 맞춰 5편으로 제작한 드와넬 시리즈와 <쥘과 짐 Jules et Jim>, <마지막 지하 철 Le Demier Metro> 등을 만들었다. 그는 아이들에 대해 관심이 많았고 남성과 여성의 관계에 대해 탐색하기도 했다. 트뤼포 는 "영화를 만드는 고통을 표현하고 싶었다. 자신의 영화를 보면서 설레이지 않는 영화는 만들고 싶지 않았다."고 말 할 정도로 누벨 바그 감독들 중에서 가장 열정적인 영화광이었다.

   고다르는 데뷔 이후 장르 영화를 패러디한 영화들을 찍다가 1968년 학생 운동 이후 좌파로 일대 변신한다. 마오이즘의 노선에 따라 영화를 제작하였으며, 누벨 바그 감독 중에서 논쟁적인 관심거리를 가장 많이 제공하였다. <마리아께 경배를 Je Vous s alue Marie>, <그녀의 인생을 살다 Vivre sa Vie>, <남성.여성 Masculin.Feminin>, <주말 Weekend> 등을 만든 고다르는 내러티브 영화보다는 에세이 같은 영화를 선호했다. 그래서 고다르의 영화를 기승전결식 구성의 헐리우드 영화에 대한 대안적 영화로 보기도 한다. 그는 헐리우드의 고전적 양식을 깨고 장르를 변형하는 데 있어 가장 많이 행동화 한 사람이다.

   누벨 바그 세대들은 기승전결 식의 양식화된 구성에서 벗어나려 했고 저항과 변화를 전제로 기존의 문화 관습과 패러다임에서 탈피한 영화들을 만들었다. 헐리우드 영화들이 스튜디오에서 카메라로 조명을 갖추고 장르와 스타를 중심으로 영화를 찍는 것과 는 달리 누벨 바그 감독들은 네오-리얼리즘의 전통과 바쟁의 리얼리즘 이론에 영향받아 스튜디오를 떠나 거리에서 동시 녹음으로 영화를 찍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현장에서의 경험 없이 영화를 보면서 영화를 만들었고 고전적인 헐리우드식의 잘 만들어진( well-movie) 영화보다는 일부러 엉성하고 낮선 영화들을 만들었다.

   누벨 바그 감독들은 1968년 5월 학생 혁명을 계기로 결별했지만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이에 대해 영화로 대답하여, 이론뿐만 아니라 실제에 있어서도 모범을 보였다. 일정한 틀에 머무르지 않고 끊임없이 새로움을 추구하는 그들의 실 험 정신은 다른 나라의 뉴 씨네마들에 많은 영향을 두었다.





공포 영화
Horro Movie

   공포 영화는 헐리우드 내에서 저예산으로 제작되는 B급 싸구려 장르로 취급되다가 70년대부터 가치를 인정받기 시작했다. 또 미국 사회의 변화와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는 장르이다.

   공포 영화의 기원은 영국의 고딕 문학에서부터 비롯된다. 18-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왕조 시대에 유행했던 괴기 소설은 메리 샐리의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가 그 원형이다. 영국의 괴기 소설에서 영감을 얻은 헐리우드 공포 영화에 스타일을 제공한 것은 독일의 표현주의 영화이다.

   프로이드적인 심리 구조가 따른 복잡하고 혼란스러운, 그러면서도 신비주의적 색채가 강하게 드러나는 1920년대 독일의 표현 주의 영화는 인공적인 조명과 기괴한 세트를 강조하면서 당시 독일의 어두운 사회 분위기를 반영하는데(대표작: <칼리가리 박 사의 밀실 Das Kabinett des Dr. Caligari>('19), <노스페라투 Nosferatu>('22)), 1930년대 히틀러의 집권 아래에서 억 압받은 독일의 표현주의 감독들은 미국으로 대거 이동하였고 자연스럽게 표현주의는 헐리우드로 이식되었다.

   1930년대 헐리우드에서 자리를 굳힌 공포 영화는 프랑켄슈타인과 드라큘라를 모델로 삼아 표현주의적인 연출로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얻어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접어들면서 아류작들이 범람하면서 조금씩 퇴조 현상을 보인다.

   1950년대에 접어들어 미국의 영화인들은 전통적인 공포 영화의 틀에서 벗어난 SF적인 공포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다. 이 SF물 들은 매카시즘 McCarthyism을 위시한 '냉전 시대의 산물'로서 미국인들의 외계인에 대한 불안감은 곧 공산주의로 대표되며 이것 은 미국인의 '레드 컴플렉스'를 반영한 것이다.

   1960년대 초반, 미국에서는 좌파 성향의 자유주의 운동이 일어나면서 여성주의, 핵 반대 평화 운동, 인종 차별 문제 등이 사 회의 표면으로 떠오른다. 그러자 정치의 역설적인 풍자가 강한 공포 영화에서도 변화가 생기게 되는데, 소위 아메리칸 나이트메 어 혹은 모던 호러 필름으로 공포 영화 초기의 신비주의적 색채가 좀더 현실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전 공포 영화에서 외부로 부터 온 괴물은 내부에서 생겨난 괴물로 대치된다. <싸이코 Psycho>('60)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더 이상 괴물은 초월적 존재가 아니라 현실적으로 존재 가능한 인물로 변신을 겪는다.

   1970년대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의 후유증과 경기 침체로 사회적 불안감이 고조되고 자유주의에 대한 우파 반격이 시작된다. 이런 보수적 위기 의식을 반영하여 재난 영화인 <타워링 Towering>('74), <포세이돈 어드벤쳐 Poseidon Adventure>( '72) 등의 영화가 유행한다. 그리고 초현실적인 존재인 악마에 대한 공포를 불러일으키며 사회적 폭력의 배후에 악마가 존재할지 도 모른다고 주장하는 <오멘 Omen>, <엑소시스트 Exocist>류의 영화들이 등장하여 한동안 대중들을 사로잡는다.

   레이건 정부는 미국 사회의 보수성을 굳혀가고 미국 사회를 강력한 군사력에 기반한 세계의 강국으로 위치 지운다. 이런 사회 적 흐름은 1970년대까지의 공포 영화가 가지고 있던 사회 비판적 내용인 자본주의 사회의 억압을 깨뜨리려는 움직임, 남성 중심 사회에 대한 억압된 욕망의 표출, 문명의 탈을 쓴 야만성 등의 급진적인 방향을 수그러들게 만든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공포 영화는 저소득층을 겨냥하여 단순하고 유사한 내용의 시리즈물인 <나이트메어 Nightmare>, <13일의 금요일 Friday the 13th> 등이 만들어지며 사회적 가치를 잃어 간다.

   1990년대의 공포 영화는 1980년대의 약화를 닫고 첨단 공상 과학을 무기로 하여 사회 다변화의 산물인 '사회적 불안감'을 반 영하여 부활한다. 문명이 발달함에 따라 유출되는 인간성의 부재를 외계인의 침입으로 문명의 공포를 경고하기도 하며, <바디 스내쳐스 Body Snatchers>와 같은 영화는 미국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가족 붕괴를 위기로 표출시키기도 한다. 또한 20세기의 흑사병이라 불리는 에이즈의 공포가 영화에 표현되기도 하는데 이것은 <드라큘라 Dracula>('92), <뱀파이어와의 인터 뷰 Interview with Vampire>('94) 등을 통해 재현된다. 그리고 공포 영화는 코미디와의 결합, SF와의 결합 등 다른 장르 영화 와 혼합을 하면서 변형된 형태로 나타난다.

   공포 영화의 역사는 사회적인 문제를 항상 저변에 배치함으로써 좀더 현장감 있는 공포를 유발시켜 왔다. 과거 싸구려 장르로 인식되었던 공포 영화는 첨단 장비와 특수 효과를 동원하며 현재는 대작 공포 영화의 붐이 일고 있다. SF, 드릴러 등의 장르를 초월하고 있는 동포 영화의 현주소는 다른 장르 영화가 그렇듯이 사회적 맥락과 첨단 과학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차원의 영화를 선보이고 있다.





뉴 저먼 씨네마
New German Cinema

   뉴 저먼 씨네마를 시기적으로 자른다면 오버하우젠 선언(1962)에서 함부르크 공표(1979)까지이다. 독일은 1920년대 표현주의 영 화 이후 나찌즘의 대두로 영화 산업이 활기를 잃게 되었고 전범 국가에 대한 연합국의 통제하에 이러한 현상은 더욱 가속화되었 다. 연합국은 나찌의 생산 체계를 해체시켰고 영화사들은 분리시켜 독일의 영화적 터전은 미약해진 것이다. 그런 상태에서 무차 별적으로 수입된 헐리우드의 영화들은 독일 영화를 고사시키기에 충분하였다. 아울러 연합국은 다양성을 추구한다는 미명하에 독 일의 중앙 집중적인 협동조합 노조를 해체시켜 제작 분야가 회생 불능의 상태로 약화되었다. 그 결과 제작, 배급, 흥행으로 이루 어진 영화 산업중, 배급이 주도권을 쥐게 되었고 대다수의 배급 구조는 미국 회사에 의해 장악되었다.

   이러한 사면초가 속에서 과거의 영화 전통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독일 젊은 세대들의 의식이 '새로운 영화에 대한 갈망'으로 등 장했고 거기에는 누벨 바그 운동이 영향을 주었다. 알렉산더 크루게와 25명의 젊은 영화인들은 단편 영화제의 기회를 빌어 마침 내 새로운 독일 영화를 위한 선언을 채택하게 된다.

   "이제 새로운 영화가 도래할 기회가 왔다.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는 독일의 단편 영화들이 토대가 되어 새로운 독일 의 장편 영화를 만들게 될 것이다. 이 영화들은 새로운 자유를 원한다. 기존의 산업적 관심으로부터 자유, 상업적 고려에서의 자 유, 특정 그룹의 지배로부터의 자유를. 이제 아버지 세대의 영화는 죽었다. 우리는 새로움을 신봉한다."

   '선언'으로 시작한 뉴 저먼 씨네마는 영화 재정에 있어서 TV 방송국(ARD, ZDF)과 [청년 독일 영화 관리국]이라는 비영리 단 체의 도움을 받았다. 몇 년 뒤 재원이 바닥나자 새롭게 제정된 지원책(2년 내에 50만 마르크의 수입을 올린 영화에만 지원)에 의 해 유명 무실해졌다. 그후 여러 영화 감독들이 모여 [작가 영화 제작사]를 설립하여 TV 방송국과의 협력 하에 공동으로 제작비를 부담하게 되었다.

   또 뉴 저먼 씨네마는 TV의 제작 지원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 피터 한트케, 귄터 그라스, 괴테, 입센, 브레히트 등의 원작을 각색하여 지성적이고 사색적인 영화를 만들었고 감독들 중엔 정치학과 사회학을 공부한 사람이 많아 영화 속에서 어떤 것을 다루 더라도 그들의 사회적, 정치적 발언이 공통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그들의 스타일은 흑백 필름의 사용, 연극적 셋트, 로케이션의 최소화, 조명의 배제, 현대적 이야기의 채용, 기존 음악사용, 인물의 최소화 등을 통해 건조하고 암울한 분위기를 유지하는 것이 특징이다.

   뉴 저먼 씨네마의 주요 감독들로는 먼저 알렉산더 크루게가 있다. 그는 뉴 저먼 씨네마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며 각종 선언의 주도자였다. 폴커 슐렌도르프는 헐리우드적 전통을 따라 잘 짜여진 상업적 영화를 만들었다. 베르너 헤어쪼크는 현대인 들의 욕망과 감정 표출을 잘 이끌어 냈는데 대표작으로는 <아귀레, 신의 분노 Aguirre, der Zorn Gottes>, <피츠카랄도 Fitzcarraldo> 등이 있다.

   뉴 저먼 씨네마의 요절한 천재인 라이너 베르네 파스빈더는 멜로드라마 형식을 따라 억압받는 사람들, 왜곡된 독일의 현실, 파시즘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대표작으로는 <사계절의 상인 Handler der Vier Jahrezeiten>, <마리아 브라운의 결혼 D ie Ehe der Maria Braun> 등이 있다. 최근까지도 활동을 하고 있는 로드 무비의 거장 빔 벤더스는 로드 무비 3부작인 <도 시의 앨리스 Alice inder Statden>, <그릇된 행동 Falsche Bewegung>, <시간의 흐름 속에서 Im Lauf der zeit>에 서 독일 전통에 대한 거부와 뿌리 뽑힌 젊은이들의 문제를 다룬다.

   뉴 저먼 씨네마는 네오-리얼리즘, 누벨 바그로 이어져 오는 예술 영화 운동의 맥을 계승하였고, 작가 영화가 산업적으로 독립 할 수 있는 대안을 모색하였다. 그리고 사회, 정치적으로 진지하게 발언하는 영화의 가능성에 대해 탐구하였고, 독일 영화의 르 네상스를 이룬 점에서 큰 성과로 평가된다. 그러나 관객들이 감독들의 의도대로 따라 주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 고 그 흐름이 약화되어 해체되었다.

   함부르크 선언에서 "우리는 프로이며 우리 영화를 보건 말건 심지어는 우리 영화와 전혀 다른 영화를 꿈꾸는 관객일지라 도 우리의 동조자다. 우리는 계속 나아갈 것이다."라고 선언했던 그들의 다짐은 현실을 극복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아메리칸 뉴 씨네마와
인디펜던트 영화의 등장

   '미국 영화사'는 두 번 전쟁을 겪고 나서 '세계 영화사'가 된다. 아무도 헐리우드의 가는 길을 막지 못했고 공고한 스튜디오 시스템과 영화 산업의 발달은 '예술 영화'는 넘보지 못할 새로운 미학(?)을 개발했다. 그것은 포드 자동차처럼 공정을 거쳐 대량 생산되는 '영화의 산업화'였다. 그러나 여기에 반기를 든 집단이 나타났다. 영화학자들이 '아메리칸 뉴 씨네마'라고 부르는 일 련의 반항아들은 대규모 메이저 영화사의 도움 없이 자본과 전통으로부터 벗어난 영화들을 만들었고 그들의 등장 배후에는, 미국 인디 영화의 대부로 일컬어지는 로저 코만이 있었다. [20세기 Fox]의 직원이었던 그는 [Roger Corman Production]이라는 조그마 한 독립 영화사를 설립하고 저예산 B급 영화들을 만들어 나간다. 1955년 [AIP]로 회사명을 바꾼 그는 데니스 호퍼, 프란시스 포 드 코폴라, 피터 부그 다노비치 등을 키워내고, 1970년 [New World 영화사]를 설립하여 조나단 뎀, 마틴 스콜세즈, 조 단테, 존 세일즈와 같은 수많은 인디 작가들을 양산해 낸다. 로저 코만의 계보는 1990년대의 데이빗 린치로까지 이어진다.

   가장 먼저 나온 아메리칸 뉴 씨네마의 걸작은 <보니와 클라이드 Bonnie & Clyde>이다. 갱 영화의 전통 속에서 폭력 과 섹스를 주된 정조로 하여 공황기의 실존 인물인 두 남녀의 처절한 삶과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 영화는 이후에 나온 수많은 영화에 영향을 주었으며 각 장면 장면들이 그대로 인용되고 보니의 의상이 유행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패션이 된 영화'이다.

   1969년에 나온 <이지 라이더 Easy Rider>는 저예산 영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몰고 왔다. 데니스 호퍼, 피터 폰다, 잭 니 콜슨이 의기투합해서 만든 이 영화는 당시의 히피 문화에 대해 로드 무비라는 방식으로 생각한다. 두명의 히피가 마약을 판 돈으 로 국토를 횡단하는 이 이야기는 서부극의 방향(동 → 서)을 뒤집고 있으며 허무하게 마무리되는 마지막 장면은 미국 역사에 대 한 파산 선고이다.

   이 외에도 시드니 폴락의 <그들은 말을 쏘았다 They Shoot Horse, Don't They?>('69)나 샘 페킨파의 <와일드 번치 W ild Bunch>('69), 로버트 알트만의 <매쉬 MASH>('70), 밥 라펠슨의 <파이브 이지 피시즈 Five Easy Pieces>('70) , 스티븐 스필버그의 <대추적 Duel>('71), 마틴 스톨세즈의 <박스카 버싸 Boxcar Bertha>('71) 등은 스튜디오와 메 이저 시스템이 붕괴되던 이 시기의 미국 영화사를 아로새기고 있다. 특히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대부 The Godfather>는 아메리칸 뉴 씨네마가 낳은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미국 역사의 진실을, 마피아라는 갱 집단을 통해 집념 있게 파헤친 이 영화는 1970년대 최고의 영화로 숭배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상업적 뉴 씨네마의 뿌리인 1960년대 언더그라운드에 대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미국의 뉴 씨네마를 반쪽 만 이해하는 것이다. 1960년대 뉴욕과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형성된 전위 영화는 60년대의 자유로운 청년 문화에 영향받은 것 이다. 당시까지의 상업적인 영화풍토에 반대하고 그 당시 사회 현실에 동참했던 언더그라운드 모임에는 요나스 메카스, 케네스 앵거, 브루스 코너, 스텐 브렉헤이지 그리고 앤디 워홀 등이 참여하고 있다. 그들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영화 그 자체에 몰입한다는 것'이었다. 관객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지극히 개인적이고 실험적인 그들의 영상은 그때까지의 왜곡된 '예 술의 본질'에 대해 극도의 방법론을 사용하여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했다. 1960년대의 이러한 전위 정신은 1960년 9월 28일 뉴욕에 있는 루이스 앨런의 사무실에 모여 [아메리칸 뉴 씨네마 그룹]으로 결성되고 1파 성명서를 발표한다.

   "우리는 허위로 가득하고 세련되며 호화로운 영화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거칠고 세련되지 못하지만 살아있는 영화를 원 한다. 우리는 장밋빛 영화를 원치 않는다. 우리는 영화가 핏빛이기를 원한다."

   우리가 지금 얘기하는 '아메리칸 뉴 씨네마'라는 명칭은 이들로부터 갈라져 나온 것이다. 그러나 상업주의와 비상업주의 모두 를 포함하여 60, 70년대의 미국 영화는 변화와 논쟁의 소용돌이였고 그 당시의 심각했던 작가들은 지금 헐리우드의 주류로 성장 해 있다.





제3세계의 영화 운동

   제3세계 영화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숨어있다. 우선 지리적인 구분이다. 즉 어떤 지역적 분포에 걸쳐 공통되는 영화적 현상/사조라는 것이 그것이다. 제3세계는 중남미, 아프리카, 중동, 아시아권의 영화를 말한다. 이들의 영화적 활동은 지역적으로 매우 광범위함에도 불구하고 유럽이나 미국 중심의 역사관에서 주도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소외되어 왔다. 또 하나의 의미는 '제 3세계 영화'의 정신적인 의미이다. 소비로서의 영화가 아닌 사화가 건강하게 개혁되어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생산으로서의 영화이 며, 향락으로서의 영화가 아닌 문화로서의 영화를 지향한 것이다.

   이렇듯 자국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쟁점들을 숨김없이 파헤치는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저개발 신생 국가들 의 영화를 '제3세계 영화'라는 이름 아래 놓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초 이후이다. 이러한 소위 개발 도상국의 영화들은 그들이 공유하고 있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종종 반제국주의, 특히 많은 경우에 반미주의를 동반하는 강한 민족주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 이 일반적이다. 특히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는 이러한 경향이 대표적인 예이다.

   쿠바 혁명으로 시작한 1960년대는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과 이에 맞선 베트남 인민의 항쟁, 반제국주의 세력의 등장, 그리고 6 8년 유럽에서의 사회 변혁 운동 등으로 세계는 들끓고 있었다. 이러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영화 운동이 변혁 운동의 중요한 부분 이 될 수 있다는 인식이 라틴 아메리카 영화인들의 작업에 의해 떠오르게 되었다.

   쿠바에서는 산티아고 알바레즈의 다큐멘터리나 부르주아 지식인의 정신적인 전이를 연대기적으로 기록한 토마스 구티에레즈 아레아의 <저개발의 기억 Memories of the Underdevelopement>(1968), 쿠바 사회에서의 여성들의 역할을 다룬 <루치아 Lucia>('69), <테레사의 초상>('70) 같은 영화들이 대표적인 작품이다.

   라틴 아메리카의 극영화 부문에서 획기적인 발전을 보인 것은 브라질의 '씨네마 노보 Cinema Novo'였다. 이것은 견고한 자본 주의 정권 아래서 독립적으로 작업하는 다른 라틴 아메리카 영화들을 위해 쿠바가 한 것 이상의 적절한 모델을 제공하였다. 글로 베르 로샤가 연출한 <돌개바람>('62)과 카를로스 디에게스의 <강가 줌바>('63)는 씨네마 노보의 구체적인 모습이었 다.

   씨네마 노보에 의해 야기된 열정의 물결이 사라지기도 전에 또 하나의 새로운 라틴 아메리카 영화는 칠레의 정치적 발전으로 부터 탄생했다. 살바도르 아예데의 사회주의 운동을 옹호하면서 발전한 칠레의 영화는 <나후엘토로의 작칼 The Jackal of Nah ueltero>('69)을 만든 미구엘 리틴을 비롯하여 알도 프란시아, 라울 뤼즈, 헬비오 소토 등의 주요 영화 감독들에 의해 발전하 였다. 그리고 파트리시오 구즈만의 <칠레의 전투 The Battle of Chile>('73-'79)는 제 3세계에서의 평화롭고 민주적인 방 법에 의한 사회주의로의 이행 과정과 그 좌절을 다룬 다큐멘터리로서 1973년의 칠레 정치 상황을 기록한 탁월한 작품이다.

   볼리비아는 군부의 정치 개입에 의해 탄생부터 탄압을 받은 민족 영화였다. 호르헤 산지네스를 비롯한 볼리비아의 영화인들은 민족 영화를 위한 토대를 세우기 위한 투쟁으로 <혁명 Revolution!>('65), <우카마우 Ukamau>('66) 같은 영화를 제 작하였다. 그러나 국위 손상을 이유로 그들이 몸담고 있던 볼리비아 영화 제작소에서 해고되자 그들은 [우카마우('있는 그대로' 라는 뜻의) 집단]을 결성하고 <콘돌의 피 Blood of the Condor>('69)를 비롯해서 <민중의 용기>라는 영화로, 영화가 대중을 위한 투쟁의 전선에 세울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을 보여 준 하나의 모범적 전형을 창출하였다.

   이러한 영화의 유용성은 아르헨티나의 페르난도 솔라나스와 옥타비오 케티노가 1969년에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영화가 실천 해야 할 방향을 제시한 [제3영화를 위하여]라는 글에서 명쾌해진다. [해방 영화의 집단]의 일원인 이 두 사람은 다큐멘터리 영화 인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The Hour of the Furnaces>('68)를 통해서 이 글에서 밝힌 지배적인 헐리우드 영화와 라틴 아메 리카의 작가 형식을 대체하는 제3영화를 위한 모범을 보여준다. 여기서 '제3영화'란 세 번째의 영화 형태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즉 헐리우드 중심의 소비적이고 오락적인 영화를 '제1영화', 나름대로 진지하게 현실을 고민하지만 주변만 맴돌고 마는 유럽을 중심으로 한 영화를 '제2영화', 이 두 영화적 흐름을 탈피하여 사회의 구조적 모순을 지적하고 역사의 올바른 발전 방향을 추구 하는 혁명적 영화를 '제3영화'라고 지칭한 것이다. 이 이론은, 영화가 대중을 결속시키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카메라가 '영상/무기를 끊임없이 수용하는 탄창'이라면, 영사기는 '초당 24발의 프레임을 날려 보내는 기관창'이다"라고 정의한다.

   라틴 아메리카의 '새로운' 영화는 각 국가들의 역사와 삶의 양식, 개개의 사회가 처한 경제적 발전 단계와 역사적 성격 양식, 개개의 사회가 처한 경제적 발전 단계와 역사적 성격, 전체 민족 운동 세력의 위상, 토착 민족 문화의 부피와 영향력에 따라 매 우 상이한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 영화가 갖는 본질은 사회적 삶과 이념, 시대적 갈등과의 관계 에 입각해 있다. 라틴 아메리카의 영화가 민중의 운명을 다루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까닭에서이다.





SF 영화사

   <스타 워즈 Star Wars>, <E.T.> 등을 보고 자랐으며 컴퓨터가 일상화된 90년대의 세대에게는 SF 영화란 새로움이나 놀라움의 대상이 아니라 익숙하고 경험적인 대상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SF(Science Fiction), 우리말로 '공상 과학'이란 용어는 원래 19세기 문학 장르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메어리 셀리의 <프랑켄슈타인 Frankenstein>('95),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32)에 이르기까지 SF 소설은 과학과 테크놀로 지의 진보에 따른 미래 세계에 대한 비젼을 공상과 우주를 연결시킨 픽션으로 담아 내고 있다. 초창기 SF 영화는 이런 전통에서 흉내를 내며 태어났다. 조르쥬 멜리어스의 <달세계 여행 A Trip to the Moon>('02)은 쥘 베네르와 웰즈의 소설에 바탕을 두었고 세계 영화 사상 최초의 SF 영화이다.

   SF 영화는 1920년대에 들어서서 활기를 띄게 되었는데, 이 당시 가장 주목할 만한 SF 영화가 프리츠 랑의 <메트로폴리스 M etropolis>('27)이다. SF 영화가 문명 비판의 메시지를 담을 수 있음을 무성 영화 시대에 이미 증명하였기 때문에 카메라 테 크닉과 셋트 디자인은 이후의 SF영화들이 참조하는 교과서가 되었다. 이어 30년의 <킹콩 Kingkong>, 40년대의 대중만화를 원작으로 하는 <배트맨 Batman>, <투명 인간 The Invisibleman> 등이 만들어졌는데, 초창기 SF 영화는 단순한 구경 거리 이상의 의미는 갖지 못했다.

   현대 SF 영화는 동서의 냉전과 원폭의 위기 속에서 나타났는데 이러한 불안은 외계인과 그 침략이라는 대중적인 상상력을 자 극시켰다. 돈 시겔의 <신체 강탈자들의 습격 Invasion of the Body Snatchers>('56), 윌콕스의 <금지된 혹성 Forbidden Planet>('56) 등은 SF 영화 첫 번째 전성기의 걸작품들이었다. 이 작품들은 SF+공포 영화라는 50년대 SF 영화의 공식을 가능 하게 했다.

   60년대의 SF 영화는 내용보다는 형식이라는 기술적인 진보로 나타났다. 스탠리 큐브릭의 <2001년 우주 여행 2001: A Space Odyssey>('68)은 인류의 문명 비평을 SFX(Special Effects, 특수 효과)로 담아 내어 현대 SF 영화의 고전이 되었다. 공개 당 시 '난해하다'는 비평을 들었지만 SF 영화의 획기적 전환점이었던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후부터 SFX는 SF 영화의 기본적인 조건이 되었다.

   70년대의 SF 영화는 관객과 새로운 감각의 엔터네인먼트로 만나고 있다. 조지 루카스의 <스타 워즈>('77), 스티븐 스필 버그의 <미지와의 조우 Close Encounters of the Third Kind>는 동화 속 세계에 최첨단 SFX 기술을 투자함으로써 대중 엔 터테인먼트로서의 SF 영화 시대를 열었다. 또한 리들리 스코트의 <에이리언 Alien>('79)은 현대 SF영화가 80년대의 새로운 경향으로 전환되는 과정에 위치하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80년대는 SF 영화의 황금기라고 할 수 있다. <E.T.>의 등장은 80년대 SF 영화의 상업적 성공의 포문을 열었다. 하지만 80년대의 SF 영화들은 <블레이드 러너 Blade Runner>, <터미네이터 Terminator>, <플라이 The Fly>, <배트 맨>, <토탈 리콜 Total Recall> 등을 통해서 과학과 테크놀로지의 진보에 따른 미래 세계에 대한 비젼을 제시하는 대신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미래 세계의 악몽을 그려내고 있다.

   SF 영화는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SF 영화의 미래에 대한 상상력은 테크놀로지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입장을 취하는데, 하나 는 과학 기술이 궁극적으로 문명의 진보를 보장할 것이라는 낙관적 비젼이고 다른 하나는 과학 기술이 지닌 파괴적인 측면을 경 고하는 묵시록적 비젼이다. 하지만 이 두 입장에 따라 영화들이 확연히 구분되지는 않으며 한 영화 속에서 공존하기도 한다. 또 한 SF영화는 당대의 역사.사회와 이중적으로 관계한다. 미래.외계를 배경으로 한다는 점에서 표면적으로 탈역사화된 것처럼 보이 나, 대부분의 SF 영화들은 당대 사회에 대한 은유로 읽힐 수 있다는 점에서 우회적으로 역사를 다루는 텍스트이기도 하다. SF 영 화의 이러한 이중성은 장르로서의 특징에서도 드러난다. 70년대 후반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SF영화는 장르 사이의 경계를 무너뜨 렸으며, 장르에 고유한 관습의 축적, 발전보다는 다른 장르와의 끊임없는 접합으로 특징 지워진다. 특히 장르 사이의 경계가 무 차별화되고 있고 장르의 관습들이 변용, 재구성되는 것이 오늘날 영화계의 흐름임을 볼 때, 그러한 현상의 중심에 SF 영화 장르 가 놓여 있는 것이다. SF영화는 그 상상력의 무한함과 열린 장르로서의 특징을 통해 영화의 미래에 대한 우리의 기대에 새로운 가능성을 가지고 다가올 것이다.





컬트 영화
Cult Movie

   1990년대 초 한국에는 '컬트 Cult'라는 새로운 장르(?)가 소개되었다. 어떻게 보면 순전히 미국적인 현상인 컬트 영화의 대두 는, 서서히 확산되는 영화광의 숫자와 함께 급속한 저변 확대를 이루었고 이제는 어엿한 영화의 분과로 자리잡아 버렸다. 그러나 컬트는 결코 규정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며 미학적으로 분류할 수도 없는 영화들의 덩어리이다. 다만 영화사회학적인 입장에서 나타난 현상을 분석한 '현상의 이름'일 뿐이다. 그러면 컬트의 사전적 의미로부터 출발하여 컬트의 윤곽을 잡아 보자.

   '컬트 Cult'라는 단어는 '예배, 제사, 숭배 행위, 사이비 종교파의 예배의식'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1차적 의미를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예를 들면 알란 파커의 <엔젤 하트 Angel Heart>와 같은 영화)는 특별히 '오컬트 영화 occult movi e'라고 하며, 이것은 영화의 소재에서 따온 하위 장르의 명칭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컬트 영화는 관객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새로운 영화 현상을 말한다. 우선 컬트는 적당한 소수의 열광적인 관객층이 형성되어 있다. 같은 영화를 몇 번씩 보는 매니아들 이 영화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1960년대 미국의 청년 문화에서 발생한 이러한 속성은 기존의 영화 산업 체제에 반발하는 (영화 와 관객 사이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의 방법이었고 대학 극장이나 소극장을 중심으로 마치 '제의(祭衣)'와 같은 영화 보기가 이 루어졌다. <페임 Fame>이라는 영화를 보면 젊은이들이 극장에서 난장판을 벌이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때 상영된 영화가 컬 트의 최고봉인 <록키 호러 픽쳐 쇼 Rocky Horror Picture Show>(짐 샤만 Jim Sharman '75)이며 관객들은 무대 위에서 영화 의 화면을 똑같이 따라한다. 한국에서 이러한 현상을 찾아본다면 <영웅본색>, <천녀유혼>이 해당될 것이다. 1980년 대 말 전염병처럼 퍼진 홍콩 영화의 열풍은 같은 영화를 수십 번씩 본 영화광들로 재개봉 3류 극장을 가득 메웠다.

   그러나 단순히 컬트 영화를 영화광들의 철없는 야합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컬트 영화에는 기존의 안일한 영화들과 구별되려는 강한 '컬트 정신'이 있기 때문이다. 황당한 인물 묘사와 상황 설정을 통해 예상 밖의 이야기로 꾸려지는 컬트 영화의 근저에는 반전, 반체제, 반권위와 같은 가치 전복의 비수가 감추어져 있으며 인종주의나 성차별, 제국주의와 같은 자본주의의 더러운 속성 또한 가차없이 비판한다. 비록 상업적인 컬트 영화(컬트 팬을 노린 이상한 영화)가 물을 흐리고 있지만, 컬트의 사회 비판 정신 과 정치에 대한 고난도의 상징은 컬트를 관객만의 영화가 아닌 사회에 대한 발언으로 승격시킨다.

   컬트 감독의 명단을 살펴보면 제일 먼저 데이빗 린치를 들 수 있다. 중산층의 허위 의식과 욕망의 기괴한 분출을 이야기하는 그는 신체의 변형과 절단을 통해 야릇한 분위기를 전달한다. <이레이저 헤드 Eraser Head>, <엘리펀트 맨 Elephant Man >, <블루 벨벳 Blue Velvet>, <광란의 사랑 Wild at Heart>, <트윈 픽스 Twin Peaks> 등 그의 이상한 영화 는 열광적인 팬들을 거느리고 있다. 또 미국 B급 영화의 작가인 사뮤엘 퓰러도 <충격의 복도>, <마담 엠마>, <마 견> 등을 통해 뚜렷한 개성을 드러낸다. 그 외에도 변신과 감염의 세계를 통해 '신체의 테크놀로지'를 펼치는 데이빗 크로넨 버그 (<비디오드롬 Video Drom>, <플라이 The Fly>, <벌거벗은 점심 Naked Lunch>, <데드 링거 Dead Ringe r>, <스케너즈 Scanners>, <M. 버터플라이 M. Butterfly>), 장르에 대한 새로운 사고를 요구하는 짜집기의 명수 코엔 형제(<분노의 저격자 Blood Simple>, <레이징 아리조나 Rasing Arisona>, <바톤 핑크 Barton Fink>), 패 러디와 광기의 알렉스 콕스 (<시드와 낸시 Sid & Nancy>, <리포맨 Repo Man>), 도저히 알 수 없는 국적의 샤머 니즘을 그리는 알렉산더 조도로브스키(<성스러운 산 Holly Mountain>, <엘 토포 El Topo>, <성스러운 피 Santa S angre>) 등도 뭔가 삐딱한 영화를 만드는 감독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컬트의 막강 계보도 뉴 미디어의 세대에는 추한 꼴을 보일 수밖에는 없게 되었다. 영화의 개인 소유 시대에 더 이상 '컬트 군중의 운집'은 볼 수 없게 되었고 <페임>에서 보았던 광란의 영화 관람은 낭만적인 시대의 무용담으로밖에는 기록되지 않는다. 한때 가장 진보적인 영화 폭동도 테크닉의 그물 속에서는 꼬리를 감추고 점점 하나의 특이한 소프트웨어로 변 질되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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