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학자 박혜란의 세 아들 이야기
믿는 만큼 자라는 아이들中 (1996)
-훈이는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그림의 기초를 배우고 싶은데 한 석달만 학원비를
대줄 수 없느냐고 제의했다. 자신에게 그림의 소질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걸 확인
하고 싶은 생각이 들었나보다. 훈이는 그 때부터 산업 디잔인에 대해 관심을 보
였다. 초저녁 잠이 그렇게 많은 아이가 그 당시 한밤중에 텔레비전에 방영했던
세계의 디자인 산업 프로그램은 꼬박꼬박 볼 정도였다. 부모로서 미안했던 것은
아이 스스로 집안 형편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미술 대학 진학은 일찌감치 포
기했던 것이었다. 그러나 훈이가 자신의 꿈까지 버린 것은 아니었다. 훈이는 건
축학과를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꿈을 이룰 첫계단을 오른 것이다. 다른 급우들이
단지 수학을 잘 한다는 이유로 공과 대학을 택했고 성적이 좋다는 이유로 건축학
과를 택한 것과는 달리 훈이는 설계와 디자인, 그리고 예술 일반에 대한 흥미 때
문에 건축을 전공과목으로 골랐다. 나는 훈이가 즐거움과 보람을 느끼며 전공 공
부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 기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다.
둘째(이적)는 어렸을 때부터 노래와 춤을 좋아했다. 나는 농담처럼 우리집에서
제일 값이 많이 치인 아이는 둘째라고 하는데 그건 진담이다. 둘째는 초등학교 1
학년때 피아노를 치고싶어 했기 때문에 역시 같은 동네 젊은 주부가 하는 피아노
방에 보냈는데 어찌된 셈인지 꼬박 3년을 싫증 한 번 내지 않고 잘도 다녔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몇 달 동안 기타 학원을 다녔는데 아무도 안 나오는 시험기간
동안에도 열심히 나가서 학원 강사를 놀라게 했다고 한다. 사회학과에 들어간 것
도 결국 음악을 더 잘 하기 위해서라던 녀석은 대학교 4학년에 음반을 내었으니
자기와의 약속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부모로서 더욱 기특하고 놀랍게 생각하
는 점은 무엇에나 싫증을 잘 내는 것처럼 보이는 아이가 대학 3학년 동안 꾸준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모은 돈으로 꼭 필요한 악기를 하나하나 마련해 나갔다는 점
이다.
막내는 스스로도 너무 얌전하다고 생각했는지 초등학교 때 3학년동안 태권도 학
원을 선택해서 다닌게 과외의 전부이다. 오히려 대학교에 들어가자 인류학 공부
에 필요하다며 사설 사진 학원에 석 달동안 다녔는데 물론 교습비는 아르바이트
로 충당했다.
세 아이의 적성 찾기 과정을 늘어놓다 보니 부모가 아이 인생을 설계해 주겠다고
나서는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둘째의 중학 졸업식을 하루 앞둔 날인가, 대학 다니는 조카로부터 전화가 걸려
온 적이 있었다. 동준이가 [소년조선일보]에 톱기사로 났다는 것이다. 커다란 사
진과 함께.
내용인즉 중학교3학년 내내 귀가 잘 안들리는 난청인 급우를 도와 무사히 학업을
마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도록 ‘헌신적으로’ 도와 주어 졸업식날 선행상을 수
여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둘째로부터 한 번도 그런 비슷한 이야기도 들은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나는 깜짝 놀랐고 이내 코끝이 찡하도록 감격스러웠다. 그렇게 신
문에 실리는 ‘착한 어린이’라면 나하고는 상관없는 진짜 별난 아이들이라고 생
각하며 살아왔던 터라 나는 솔직히 충격을 받았다. 그와 동시에 엄마라는 사람이
이토록 자식을 모를 수도 있느냐는 자책감이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데 집에 들어온 아이는 그냥 덤덤했다. 어렵사리 구해 온 신문을 보여주며
감격스런 표정을 짓는 내게 그 아이가 하던 말이라니.
“아무튼 그 기자 아저씨들, 되게 쓸 거리가 없었나 봐요.”
한마디로 자기가 한 일은 별거 아니라는 거다. 다른 아이들 같아도 다 그렇게 했
을 건데, 어쩌다 자기 옆에 앉았기 때문에 자기가 도와 주었을 뿐이란다. 그러니
어머니도 뭐 특별히 착한 아들을 둔 걸로 착각하지 말라나. 자기는 보통 아이일
뿐이란다. 그러니 동네방네 떠들지 말란다. 괘씸하고도 대견한 녀석. 나는 둘째
한테 계속 퉁을 맞으면서도 대견하다는 표정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리고 거의
10년이나 다 되어가는 어떤 기억을 떠올렸다. 이번과는 전혀 반대의 풍경을.
초등학교 1학년이던 둘째는 그 동네의 YMCA체육관에서 운영하는 리틀 수영단에
들어 있었다. 운좋게도 둘째는 바로 전해에 생긴 아기 스포츠단에 추첨을 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으며, 그 다음 해에는 거의 자동적으로 수영단에 들어갔다.
여름이나 겨울이나 한 번도 빠짐없이 둘째는 샛노란 단복을 입고 열심히 다녔다.
때문에 나는 나름대로 저 녀석이 수영에 적성과 능력이 다 들어맞는구나, 하고
믿고 있었다. 그렇지 않다면 그 추운날 머리가 꽁꽁 얼어가면서도 그토록 즐겁게
다닐 리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 즈음 다른 엄마들을 만나면 자식들을 수영
선수로 키우기 위한 정보들을 번번하게 주받는 분위기였기 때문에 나도 은근히
속으로는 ‘수영선수? 좋지.’ 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아이들의 발표회가 있던 날이었다. 그 조그만 아이들이 폼도 멋있게
풀에 뛰어들어 날렵하게 물을 저어 나가는데 그 중에서 눈에 띄게 폼이 엉성하고
느린 아이가 있었다. 스탠드에 앉아 있던 엄마들이, ‘쟤 좀 보라“고 서로 치면
서 박장대소를 하는데, 어렵쇼, 가만보니 바로 둘째가 아닌가. 그때의 충격이라
니. 워낙 체구가 왜소하고 몸무게가 안 나가서 그랬는지 어쨌는지, 자유형을 하
느라 몸이 반쯤 젖혀지며 나가는데, 이건 꼭 파도에 쏠리는 가랑잎처럼 나폴거리
는 모습이 전혀 속도가 붙지 않는다.
나는 눈물이 났다. 눈치를 챈 옆의 엄마들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느지 여러 가지
로 위로의 말을 해왔지만 내게는 들리지 않았다. 속이 상해서 눈물이 난 게 아니
었다. 세상에, 나 같으면 저렇게 눈에 띄게 못한다 싶으면 아마 벌써 그만두었을
텐데, 어쩌면 1년 동안을 하루같이 그토록 즐거운 얼굴로 다닐 수 있었을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둘째는 아주 흔연스런 표정으로 자기 수영 솜씨가 어떠냐
고 물었다. 나는 엄마는 워낙 물을 무서워해서 여태까지 수영을 못 배웠는데 너
는 쪼끄만 애가 그렇게 수영을 잘 하니 얼마나 좋으냐, 정말 부럽다, 라고 대답
했다. 그 애는 신이 난 얼굴로 자기반에 누구누구는 자유형을, 그리고 누구누구
는 접영을 아주 잘 한다면서 자랑스러워했다.
아이들 마음의 구김살은 아이들이 만드는게 아니다. 둘째는 비록 수영을 능숙하
게 하지는 못할지라도 수영을 즐기는 법을 터득했던 것이다. 그것을 엄마 잣대로
재고 채찍질 했다면 그 애는 아마 중도에 그만두었을 것이 틀림없다.
-우리 아이들이 평가하는 바에 따르면, 자기들이 비교적 공부를 좋아하게 된 이
유는 단 한가지 우리 집안 곳곳에 지적 자극을 줄 수 있는 각종 책들이 널려 있
다는 점이란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 단 한 시간을 집중적으로 책을 읽을 짬이 없
었던 건 사실이지만 우리 부부는 끊임없이 새로 나온 책들을 사들였다. 신문의
신간 안내란에서 괜찮다 싶은 책은 스크랩 해두었다가 틈날 때마다 샀다. 워낙
두 사람 다 호기심이 많은 성격인 탓에 사들이는 책의 종류는 한마디로 잡스러웠
다. 만화책에서부터 시집들, 월간 종합지들, 계간 문학지들, 소설책에서 여행 안
내서, 야구 해설서, 당구 교과서 등 온갖 종류의 단행본이 구입 대상이었다.
변변한 책장도 마련하지 못하고 사는 빡빡한 살림살이에 책이 곳곳에 쌓여 있으
니 가뜩이나 청소를 안하고 사는 집안은 항상 구질구질했다. 내가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부터는 여기에다 온갖 종류의 사회과학 책들이 덧붙여졌다. 나이 들어
서 살림하며 공부하려니까 워낙 알량했던 아이들에 대한 관심이 그나마 엷어질
수 밖에, 미안한 이야기지만 아이들이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있는지 들여다 본 적
이 단 한번도 없었다. 내 코가 석자였으니까.
그런데 내가 겨우 틈을 내어 공부를 하면 아이들이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집에서
밥만하던 엄마가 어느 날부터인가 책과 씨름하면서 밤늦게 앉아 있다는 사실이
아이들에게 굉장히 신기하게 여겨 졌던 거 같다. 내가 저녁 설거지를 마치고 책
상에 앉으면 텔레비전에 넋을 빼던 녀석들이 하나 둘씩 의자를 갖고 옆으로 온다
. 아이들이 가장 듣기 싫어한다는 말, 그리고 엄마들이 가장 많이 한다는 말, ‘
공부해라’는 말이 우리 집에서는 전혀 필요 없었다. 밤늦게 귀가하던 남편은 엄
마와 아이들이 둘러앉아 공부를 하던 그 장면이 항상 감동적으로 보였다나.
-나는 대부분의 엄마들이 믿는 것처럼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과 공부 효과가 비
례한다고 믿지 않는 사람이다. 뭐 특별히 과학적인 근거가 있어서가 아니라 어렸
을 때 내가 공부했던 방식을 돌아보면 저절로 깨치게 된다. 특히 책상에 앉아서
졸거나 엎드려 자거나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 아이들
은 졸리면 책을 덮어버리고 정식으로 잠자리에 들지, 앉아서 조는 법이 없다. 텔
레비전도 보고싶으면 소파에 느긋하게 앉아서 보지 들락날락 하면서 보지 앉는다
.
첫째가 여유있게 대학에 들어갔다는 사실은 내게 터무니없을 정도의 자신감을 불
어넣어 주었기 때문에 둘째와 셋째는 고3 티도 내 보지 못하고 고3을 지내야 했
다.
하긴 둘째야 뭐 음악을 하기 위해 대학을 안 간다고 해서 그런가보다 했더니 뒤
늦게 마음을 바꾸었다고 해서 또 그런가 보다고 지켜보기만 했다.
둘째의 고3 여름은 살인적인 더위가 닥친 해였다. 고3 스트레스를 피아노를 두드
려대는 걸로 풀던 둘째는 과연 우리집에서 가장 ‘비싼아이’ 답게 제발 에어컨
을 들여놓을 수 없느냐고 제안해왔다. 에어컨이 있는 학교 도서실에서 공부를 하
다가 집에 오면 더위가 숨을 조여온다는 것이었다. 고3이 무슨 벼슬이냐고 한마
디로 밀쳐내기엔 나에게도 그 해 여름은 너무 더웠다. 나는 거금을 들여 에어컨
을 주문했다.
막내가 고등학교에 올라가던 해 둘째는 대학에 들어갔는데, 어느날 저녁 둘째가
막내에게 들려준 조언은 가히 정곡을 찌르는 것이었다.
“야, 너 괜히 어머니를 믿었다가는 큰일난다. 대학에 들어가고 싶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너 혼자 알아서 해야해, 어머니는 너 대학 못 들어가도 눈 하나 깜짝 안
하실 거야.”
둘째의 예언대로 막내는 고3때 자기 도시락도 자기가 싸 갖고 다니는 신세가 되
었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는 늘 아이들이 문제가 아니라 어른들이 문제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다. 웬일인지 상당히 생각이 깊은 것 같은 어른들도 부지불식간에
아이들에게 상처를 주는 말을 쉽게 내뱉은 것도 그 중의 하나이다. 특히 많은 사
람들이 형제간에 비교하는 말을 하면 안 좋다는 것까지는 인정하면서도, 형을 칭
찬하고 동생을 폄하하는 말을 하는 것은 괜찮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형만한
아우없다.’는 우리 속담도 이런 관습에서 비롯된 것 같다.
둘째는 그런 점에서 어렸을 때 상처를 많이 받았다. 눈이 작다고, 키가 작다고
형제간에 너무 비교를 많이 당했던 것이다.
둘째가 초등학교 5학년 때쯤이었을 것이다. 한밤중에 술이 거나하게 취해서 남편
친구들이 여럿 찾아온 적이 있었다. 큰애는 워낙 키가 훤칠하고 이목구비가 뚜렷
하기 때문에 첫눈에 아주 잘생겨 보인다. 따라서 큰애가 인사하러 나왔더니 여느
때나 다름없이 모두들 “아이구, 그놈 참 훤칠하게 잘생겼다.”고 입이 마르도록
찬사를 보냈다. 그런데 곧이어 둘째가 인사를 하자 손님들은 즉각적으로 “아니
얘는 왜 이렇게 작아, 누굴 닮았지?” 라며 웃어댔다.
그 순간 내 눈에는 둘째의 가슴에 스며드는 멍울이 너무나 선명하게 드러났다.
예전에도 무심한 어른들이 숱하게 저지른 폭력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둘째였지만 그 날 어른들의 행태는 지나치게 원초적이었다. 아마도 술 탓이었겠
지만.
“어머니, 형은 잘생기고 동생은 예쁘게 생겼는데 난 왜 이렇게 못생겼어요, 눈
도작고, 키도 작고..” 손님들이 가고 난 후 둘째는 잠을 못 이룬 채 이렇게 울
먹였다.
“아빠 친구들이 뭘 몰라서 그래. 우리 동준이가 얼마나 귀엽게 생겼는데. 요 조
그만 눈에 꾀가 얼마나 많이 모여 있는데, 엄마는 동준이가 이 세상에서 제일 귀
여워.”
둘째는 좀체로 키가 크지 않더니 중학교 2학년이 되자 갑자기 부쩍 컸다.
남과 비교되는 것처럼 싫은 일이 어디 있을까. 나는 가능한 한 형제끼리 우열을
가리는 말을 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러다 보니 남들이 들으면 우습다 못해 기
이한 장면까지 연출되기도 한다.
훈이는 겨우 제 이름자만 쓸 줄 알고 초등학교에 들어갔는데 1학년 숙제에 엄마
가 받아쓰기 열 문제를 내 주고 채점까지 해 오라는 적이 많았다. 저녁 준비에,
집안 청소에, 설거지하고 아이들 목욕시키는데 시간과 손이 한창 많이 가던 때였
기 때문에 나는 한가하게 받아쓰기 문제를 낼 여유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다행
이 둘째는 형보다 먼저 한글을 해독했던 터였기 때문에 나는 다섯 살짜리 둘째에
게 형 받아쓰기 숙제를 내 주라고 시켰다. 둘째는 신이 나서 어려운 말들을 불러
주고, 형은 또 고마워하면서 열심히 받아쓰기를 했다. 물론 채점은 내 차지였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친구들은 세상에 별일이 다 있다면서, 형이 자존심 상해하지
않느냐고 물었다. 나는 만약 형이 자존심이 상했으면 동생이 숙제를 부르도록 놔
두었겠냐고 반문했다. 준이도 형을 업신여기거나 잘난 척하지 않고 자기에게 일
거리가 생겼다는 재미를 만끽하는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신기한 것은 훈이가
한글을 잘 읽는 동생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점이다. 아마 이런 일이 가능
했던 것은 엄마가 형에게 왜 동생보다 늦되냐고 꾸짖지 않고 동생에게도 단지 형
보다 글을 빨리 깨쳤을 뿐이지 형보다 잘난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했기 때문일
것 같다. 나중에 준이가 입학했을 때는 훈이가 산수 더하기 빼기 문제를 다 내
주었다. 윤이 때는 두 형들이 도맡았기 때문에 나는 결국 아이들을 셋이나 키우
면서도 아이들 숙제를 봐 준 적이 거의 없었다는 고백을 하는 셈이다.
둘째는 고등학교때 수학 때문에 애를 먹었다. 반면 큰 애는 수학이나 물리는 공
부를 안해도 저절로 해답으로 가는 길이 보인다고 했다. 같은 형제라도 아이들은
그렇게 각자 능력과 적성이 다른 거다.
-세 아이가 모두 똑같은 성격을 가졌던 것은 아니었다. 큰애는 굉장한 조심성의
소유자였기 때문에 기어다닐 때라도 열두 평짜리 아파트의 손바닥만한 마루에서
도 현관 바닥으로 절대로 떨어져 본 적이 없었던 데 반해 둘째는 하루도 떨어지
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로 덤벙대었다. 커가면서도 큰애는 한 번도 사고를 내 본
적이 없는데 비해 둘째는 크건 작건 사고를 내거나 사고 일보 직전에 구출되어서
식구들을 놀라게 하는 일이 많았다.
둘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던 해였던가. 용인 민속천에 놀러간 적이 있었다. 아이
들은 방죽 같은 조그만 연못가에서 물고기를 들여다보던 중이었는데 갑자기 풍덩
소리가 났다. 둘째가 안 보였다. 가슴이 철렁한 채 물속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잠
시 후 둘째 머리가 쏙 올라왔다. 초가을이라 날씨가 쌀쌀했기 때문에 둘째는 이
빨을 딱딱 부딪히며 벌벌 떨었다.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도 둘째는
재미있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우리는 둘째를 사고뭉치라고 부르면서도 둘째의
호기심과 모험심을 높이 평가했다. 큰애의 조심성에 감탄하는 것과 똑같은 정도
로. 셋째는 이제까지 꼭 두 번 나를 놀라게 했다. 다섯 살 때인가. 친구네 아이
들을 따라 놀이터에 갔다가 살아졌던 일, 그리고 아파트 현관 문이 바람의 힘에
꽝 닫히는 바람에 머리가 깨어진 일, 머리를 부딪혔는데도 아무 말이 없었기애
괜찮은 줄 알았더니 혼자 화장실에 가서 세수를 하던 셋째 왈, “머리에서 자꾸
자꾸 피가 나와.” 하지 않겠는가. 들여다보니 골 속의 하얀 것이 들어날 정도로
깊게 깨져 있었다. 기절할 것 같은 기분을 간신히 참고, 일곱 살짜리를 업고 택
시 정류장으로 뛰는데 녀석은 오히려 “엄마 무거운데 내려놓으라”며 나를 위로
했다. 막내는 천성적으로 타인에 대한 배려가 많은 성격이다. 어렸을 때 과자가
두 개밖에 없으면 자기가 먹지 않고 형들에게 줄 정도였다.
소위 여성적이라고 불리는 성격들을 많이 갖고 있었기 때문에 세 아이가 모이면
거의 다투지 않고 잘 놀았다. 둘째의 호기심이 늘 재밌는 ‘꺼리’를 궁리해 냈
고 큰애의 조심성과 막내의 배려가 합치다 보니 싸움이 별로 없었다.
- 아이를 키우면서 나는 아이가 크는 만큼이나 나 자신도 함께 커가는 것을 느낀
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담긴 아이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사랑하는 법을 배우고,
무한한 신뢰를 받는 기쁨 속에서 나역시 인간에 대한 신뢰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책을 놓은 지 15년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을 때 그 어려움은 예상보다 훨씬 더
컸다. 우선 전업주부 10년의 경력은 나에게 한군데에 집중하는 능력을 완전히 빼
앗아갔다. 책을 읽으면 글자들이 눈에까지만 들어올 뿐 뇌에까지는 좀처럼 들어
오려고 하지 않았다.
어느날 자정 넘어서까지 거실에 앉아서 공부를 하다가 나는 너무 속이 상해서 혼
자 밥상에 엎드려 울고 있었다. 어쩌면 이렇게 돌대가리일 수 가 있을까... 어쩌
면 이렇게.. 자탄하면서 한참을 그렇게 울고 있는데 조그만 몸이 내 등 뒤에 실
려왔다. 둘째였다. 오줌이 마려워 깼다가 엄마의 그런 모습을 보고 놀랐나보다.
\"엄마는 우리한테는 꼭 1등이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으면서
엄마는 지금 욕심대로 안되니까 속이 상한거지? 엄마, 꼭 1등 안해도 돼,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거야.\"
이 조그만 아이가 바보같이 울고 있는 엄마의 등을 어루만지며 속삭이듯 야단을
치는 거였다. 내가 저희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되돌려 주면서 나를 간곡하게 위
로해 주었다. 나는 부끄럽기도 하고 대견스럽기도 해서 얼른 울음을 그쳤다. 아
이의 위로는 변화된 환경 속에서 긴장으로 메말랐던 나의 마음을 따뜻하게 적셔
주었다. 매사가 이런식이다. 머리가 굵어지면서부터 늘 영언한 천적처럼 나를 비
판하고 입씨름하던 아이들은 내가 우울해하거나 힘이 빠질 때면 마치 오빠들처럼
나를 위로해주고 달래 주었다. 아마 저희들이 외로워할 때 내가 위로해 준 것을
잊지 않고 있었나보다.
-우리 아이들은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혹은 엄마라는 이유만으로, 집안일을 도맡
아 하는 나를 불쌍하게 여긴다. 특히 내가 저녁 늦게 양손 무겁게 슈퍼마켓 봉투
를 들고 들어오면 아이들은 “아버지도 늦게 오실 텐데 그냥 라면이나 끓여 먹자
.” 라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럼 나는 나대로 갑자기 훌륭한 어머니 티를 있는
대로 내면서, “점심도 시원찮게 먹었을 텐데 저녁까지 라면을 먹일 수는 없다.
” 라며 비장한 표정으로 저녁을 준비한다.
집에 보온 도시락통을 사 놓고도 그냥 도시락에 싸 주다가 아참, 하고 정신을 차
렸을 때는 이미 겨울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이 추운날 찬밥을 꾸역꾸역 먹을 생각을 하니 \'부모있는 고아들\'이 따로없다
싶어, 나는 내 무심함에 더 화가 났다. \"아니, 왜 엄마한테 보온도시락 싸
달라고 하지 않았니?\" 하고 화를 내니 아이들은 그냥 먹을 만했다면서 오
히려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된 아이들인지. 그 에미에 그 아들들이라고
말하려니 솔직히 켕기는 기분이다.
둘째가 중3때 내 생일날 전해준 편지에 바깥 일과 집안일의 틈바구니에서 허우적
대는 엄마를 [엄마의 하루]라는 시에 담아 그렸는데 엄마의 괴로움이 너무 생생
하게 그려져서 시를 읽는 친구들마다 “하, 고놈.” 하며 혀를 찼다. 이 시는 내
가 쓴 [삶의 여성학] 뒷부분에 실렸는데 그걸 읽으신 작가 박완서 선생은 어떻게
중3짜리 남학생이 엄마의 삶을 그리도 정확하게 포착했느냐며 감탄을 거듭하셨다
.
엄마의 하루
&
nbsp;
&
nbsp; 이동준
습한 얼굴로
AM 6:00이면 시계같이 일어나
쌀을 씻고
밥을 지어
호돌이 보온 도시락통에 정성껏 싸
장대한 아들과 남편을 보내 놓고
조용히 허무하다.
따르릉 전화 소리에
제2의 아침이 시작되고
줄곧 바
책상머리에 앉아
고요의 시간은
읽고 쓰는데
또 읽고 쓰는 데 바쳐
오른쪽 눈이 빠져라
세라믹펜이 무거워라
지친 듯 무서운 얼굴이
돌아온 아들의 짜증과 함께
다시 씽크대 앞에 선다.
밥을 짓다
설거지를 하다
방바닥을 닦다
두부 사오라 거절하는 아들의 말에
이게 뭐냐고 무심히 말하는
남편의 말에,
주저앉아 흘리는 고통의 눈물에
언 동태가 녹고
아들의 찬 손이 녹고
정작 하루가 지나면
정작 당신은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되뇌시며
슬퍼하는
슬며시 실리는
당신의 글을 부끄러워하며
따끈히 끓이는
된장찌개의 맛을 부끄러워하며
오늘 또
엄마를 잘못 만나서를
무심한 아들들에게
되뇌이는
‘강철 여인’이 아닌
‘사랑 여인’에게
다시 하루가 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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