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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이 최악의 폭력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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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폭력이 최악의 폭력일 수도 있다
[서평] 평화를 향한 열정 - 폭력과 적대의 조건에 왜 침묵하나
박장준 기자 weshe@mediatoday.co.kr         2011년 12월 11일 일요일
      

세계를 바꾼 세 개의 사과가 있다. 첫째는 신에게 도전한 아담과 이브의 사과, 둘째는 자연에 대한 해석을 독점한 종교에 맞선 뉴튼의 사과, 셋째는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압제에 저항한 윌리엄 텔의 사과다. 앞선 두 개가 신학의 사과, 자연과학의 사과라면 마지막은 여전히 움켜쥐지 못한, 쟁취해야 할 사회과학의 사과다.

인간에 대한 인간의 압제(또는 착취)는 개인적/집단적, 오래된/새로운 폭력들을 포함한다(물론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인간의 사회적 관계들(구조)에 깊숙이 자리 잡은 폭력들은 구체적인 권력관계(갑을병정)으로 ‘미분’되기도 하고, 때론 인종청소(제노사이드)와 같이 ‘적분’의 형태로 드러난다.

들뢰즈가 말한, 생존 자체를 위협하는 ‘억압의 최저한도’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보자. 2009년 1월20일, 국가의 재개발 정책과 자본의 재개발 집행에서 세입자 다섯이 숨졌다. 건물주의 권리가 우선하는 정책, 세입자를 쫓아내는 집행의 폭력(violence)과 망루와 화염병의 대항폭력(counter-violence)이 맞붙었다.

혹자는 말했다. ‘촛불을 들고 비폭력으로 저항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다.’ 맞는 말이다. 발터 벤야민이 얘기했듯 “문명화된 세계가 온건한 합의수단의 사용을 허락해 줄 때 그러한 비폭력적 합의는 언제나 가능하다.” 그러나 수단으로서 비폭력은 “인간간의 갈등의 직접적 해결에는 적용될 수 없고 오직 객관적 일에만 적용될 뿐이다.”

용산참사는 국가·자본과 세입자가 토론으로 해결할 수 없는 ‘적대’를 드러낸 사건이다. 법과 제도는 세입자보다 건물주의 이익과 권리에 방점이 찍혀있고, 이것은 자체로 주체를 소멸하는 ‘초-주체적 폭력’의 가능성을 담보했다. 또 국가는 ‘법’을 근거로 주체의 조건을 없애는 ‘초-객관적 폭력’을 언제든 행사할 수 있다. 용산참사에는 화해불가능한 모순, ‘적대’가 있었고, 그래서 폭력과 대항폭력이 부딪혔다.

폭력을 부정하는 방식에는 비폭력, 대항폭력이 있다. 간디와 루쉰의 문장을 인용하는 것만으로 그 의미를 충분히 드러낼 수 있다.

“비폭력은 나에게 단순한 실험이 아닙니다. 이는 나의 삶의 일부입니다. 진리 탐구의 교리, 비협조, 시민불복종과 같은 것들은 비폭력이 인간의 삶에 있어 근본적인 법이라는 근본적인 입장에서 나오는 필수적인 추론들입니다. 이는 나에게 수단이자 목적입니다. …… 나는 따라서 모든 것들을 비폭력적으로 실험해야만 합니다.”

“관용이 미덕이라는 건 비겁자가 생각해 낸 것은 아닐까, 보복할 용기가 없는 비겁자가 생각해 낸 말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아니라면 비겁한 악인이 생각해 낸 것으로, 자기는 남에게 위해를 가하면서도 남의 보복을 받는 것을 두려워 관용이라는 미명으로 기만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img src=http://ph.mediatoday.co.kr/news/photo/201112/99057_90165_4425.jpg>
▲ 평화를 향한 열정 / 스튜어트 리즈 지음 김동진 옮김 / 삼인 / 2011

‘평화를 향한 열정’은 비폭력을 주장한다. 글쓴이 스튜어트 리즈는 삶의 방식으로서 비폭력뿐 아니라 UN을 통한 평화 구축, 그것도 정의를 동반한 평화를 제도적으로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비폭력적 삶의 방식을 통해 정의로운 평화를 구축하고, 비폭력적 평화운동을 통해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국제사회에 관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주장에는 몇 가지 아포리아가 있다. 그는 폭력이 우리에게 미리 주어진 조건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평화의 조건으로 적대를 인식하지 못한다. 그에게 평화는 전쟁과 권위의 정반대에 위치한 어떤 모습이다.

우리는 간디의 평화주의와 비폭력을 특수한 정세에서 유효한 전술과 구호로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한계를 짚어야 한다. 간디는 빈민의 열악한 처지를 동정했지만 카스트제도에 반대하지 않았다. 폭력에 반대했지만 폭력의 조건에 반대하지는 않은 것이다. 많은 비폭력주의자들이 폭력의 조건과 화해불가능한 모순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반대로 대항폭력을 주장하는 편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의 대항폭력은 ‘테러리즘’의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공포정치의 엄격한 규율 아래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를 지속하고 있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철학자 에티엔 발리바르는 폭력의 조건에 반대하자는 의미에서 ‘반폭력’(anti-violence)을 주장한다. 그는 비폭력과 대항폭력 사이에서 대안을 찾지 못하는 평화운동이 나가야 할 방향으로 보다 적극적인 구호― ‘군사 세계화 반대’, ‘일방적인 군축’ ―를 제안하면서 폭력과 적대의 조건을 비판하고 반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항수단으로 폭력을 사용할 것인지 여부는 정세에 따라 다를 수 있다. 반폭력의 문제설정이 비폭력과 대항폭력에 우선한다는 뜻이다.

비폭력을 절대선으로 생각하는 것에 대해 자크 데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비폭력은 어떤 의미에서는 최악의 폭력이다.” 이제 우리는 비폭력, 대항폭력이 말하지 않은 것에 대해 말해야 한다.
* 너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7-02-12 2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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