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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신호등 안 지키기 / 후지이 다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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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읽기] 신호등 안 지키기 / 후지이 다케시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합당하지 않은 사소한 법들을 매일 어기도록 하세요.” 미국의 인류학자 제임스 스콧이 최근에 번역된 <우리는 모두 아나키스트다>에서 한 말이다. 이것만 놓고 보면 법을 어기라고 선동해 사회질서를 파괴하려는 아나키스트다운 말이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단순히 사회질서를 파괴하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동남아 농민들에 대한 연구로 1970년대 후반부터 세계적으로 알려진 인류학자인 스콧이 자신의 입장을 아나키즘이라는 말로 표현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몇십년에 걸쳐 소농을 비롯한 ‘약자들’의 저항에 관심을 기울여온 그가 발견한 것은, 모든 것을 규격화하고 관리하려는 국가와 그런 통치에서 벗어나기 위해 다양한 전략을 구사하는 사람들의 투쟁의 역사였다. 국가에 대항하며 자율적으로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이 그를 자연스럽게 아나키즘으로 인도한 것이다. 그래서 그의 아나키즘은 전혀 이념적이지 않고 철저하게 경험적이다.

앞의 인용은 독일에서 그가 겪은 경험에서 나온 말이다.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데도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계속 지켜보면서 스콧은 그들에게 신호를 위반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그는 우리가 “앞으로 언젠가는 정의와 합리의 이름으로 중요한 법을 어기라는 요청을 받게 될” 때에 대비할 필요를 이야기한다.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그날에 대비하기 위해 그가 내놓은 것이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 즉 신호 위반을 비롯해 합당하지 않은 법을 매일 어기자는 것이었다. 어떤 법이 정의롭고 합리적인 것인지 자신의 머리로 직접 판단하는 훈련을 통해 날렵하고 민첩한 정신자세를 유지할 수 있으면, 중요한 날이 왔을 때 우리는 준비가 되어 있을 거라는 이야기다.

스콧이 권장하는 법규 위반은 ‘미래의 그날’을 위한 준비체조로 자리매김되어 있지만, 사실 이런 실천들 자체가 ‘미래의 그날’을 만드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누구나 한두 번은 그런 경험이 있을 텐데, 아무리 사소한 법규 위반이라도 자신의 판단으로 의식적으로 저지르게 될 때, 사람은 긴장감 속에서 많은 것을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게 된다. 그때 이미 우리는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순간 속에 있다. 이 순간 정치는 시작된다.

정치란 원래 법 바깥에 있다. 대의제민주주의의 핵심기관인 의회에서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 법의 제정 또는 그 개폐인 것은, 합법과 불법의 경계선이 늘 유동적이어서 그것을 그때그때 정하는 것이 바로 정치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항상 이미 불법행위를 전제로 하며 그런 토대 위에서 작동한다. 이런 점에서 보면 스콧이 이야기하는 ‘아나키스트식 유연체조’는 정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물론 법을 어기기만 하면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출발점일 뿐 그 다음에 어떤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느냐가 그 정치의 방향을 결정하겠지만, 우선 중요한 것은 우리를 정치적 주체로 만드는 것이 법의 테두리에서 벗어나는 순간 몸이 느끼는 긴장감이라는 점이다.

국가는 자꾸 우리를 둘러싼 다양한 위험에 대해 이야기하며 우리를 국가에 의지하게 만들려고 한다. 하지만 안전이란 국가에 의해서만 지켜지는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의 한 작은 도시에서는 신호등을 없앰으로써 교통사고를 감소시키는 데 성공했는데, 이는 인간의 능력이 어떻게 발현되는지 잘 보여준다. ‘안전’을 보장해주던 신호등이 사라지자 운전자는 긴장을 유지하면서 주변에 있는 사람들의 움직임을 보게 되고 그로 인해 사고가 줄어든 것이다. 그들은 말한다. ‘안전하지 않은 것이 안전하다.’

후지이 다케시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실장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665703.html#csidx97305093f1c73c4984dd479b09da96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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