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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폭력'을 말하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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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네 살 아이가 '여한이 없다'며 자살, 그런데도…"
['학교폭력'을 말하다]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이명선 기자     필자의 다른 기사

기사입력 2012-10-24 오후 12:02:17

"교육의 중요한 주체인 교사, 학부모, 학생들이 실상 자기 손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그런 굴욕감에 절어 있다. 아주 기계적인 문제 해결 과정을 답습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내 곁에서 이 문제들이 안 벌어지기만을 바랄 정도로, 우리는 극도로 수동화되어 있다."

지난 17일 '교육공동체 벗'과 '알라딘'이 주최한 강연 "누가 진짜 일진인가 - 학생인권과 학교폭력"에서 이계삼 편집위원은 "학교가 갈수록 전체주의화, 파시즘 체제가 되어 가고 있다"며 '교육 불가능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는 교육주체들의 무능한 자화상을 한탄했다. (☞바로 가기: '교육공동체 벗' 온라인 커뮤니티)

이 편집위원은 특히 '학교폭력과 밀양 송전탑 건설 문제가 결코 다르지 않다'며 미국 정치학자 더글라스 러미스(C. Douglas Lummis)의 말을 인용해 '우리는 이미 인민이 무력감을 느끼는 체제가 돼 있다'라고 지적했다. 얼마 전까지 일선 교육 현장의 교사, 지금은 밀양 송전탑 건설을 반대하는 현장 활동가인 그의 말에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무력감이 짙게 배어 있었다.

그는 "(지난해)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 이후 학교폭력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 계속 공허한 생각이 들었다"고 토로했다. "'사람들은 답이 있을까' 해서 찾아오는데, 답이 없는 얘기를 계속해야 하는 공허함"과 "'10년이 넘는 교사 생활 동안 학교폭력 문제에 존재를 걸고 고민하지 않았다'는 반성" 때문이었다. 그는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우리 모두가 폭력에 관해 중병이 걸려 있지만 (대구 중학생 자살 사건이 폭력을 생각해보게 하는) 출발선이 됐다"고 말했다.


▲ 이계삼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은 지난 17일 "누가 진짜 일진인가 - 학생인권과 학교폭력"을 주제로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폭력에 관해 중병에 걸려 있다"고 말했다. ⓒ교육공동체 벗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상처의 존재다"

'교육'은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을까. 이 물음에 이계삼 편집위원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아이들의 상처는 그 아이들의 책임이 아니다. 태생적으로 얻은 것"이라며 "아이의 것과 아이 아닌 것을 구분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아이들은 '학교'이전에 가정환경에서부터 기본적인 상처를 갖고 있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문제는 학교와 사회가 이런 아이들의 상처를 "치유해주겠다"며 나서서 제도화하려는 것.

"치유해주겠다, 혹은 없애주겠다는 발상이 더 문제가 아닌가. 상처와 같이 대화하고 어루만져주고, 그러면서 견딜만한 것으로 보듬어 주는 게 교육이다. 그런데 이런 원천을 아예 없애버리거나 기구나 전문가에게 떠넘기려는 방식으로 자꾸 제도화시키려 한다. 나는 이것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학교폭력의 증상보다 훨씬 가공할 만한 것이라 생각한다. 요컨대 '우리는 네 상처에 관심이 없다, 당장 우리 눈앞에서는 이런 일 보고 싶지 않으니 잠시 꺼져달라'라는 것이다."

그는 또 "학교가 파출소가 되어 가고 있으며, 다른 한 축으로는 병원이 되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가 "(학생이) 잘못하면 잘못한 만큼 처벌하고 이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서로 숙의하는 것이 아니라 문제를 다른 곳으로 이월시키고 있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권고 전학, 즉 쫓아 보내거나 학교생활기록부에 빨간 줄을 남겨서 낙인을 찍거나, 아니면 상담전문가나 정신과 의사에게 보내서 치료받아라"라고 하면서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파출소로 보내든, 병원으로 보내든 학교에서 문제시 된 아이들은 눈앞에서 사라지겠지만, 이 일에 연루된 아이들의 상처도, 거기서 발생한 폭력의 크기도, 눈덩이처럼 굴러서 커질 것이라는 말이다. 그는 "다만 자기 눈앞에서만 사라지기를 바라는 이 안락한 정서, 내 학교, 내 새끼만 아니면 괜찮다는 사회적 연대의식의 파탄"에 오늘날 학교 폭력 문제의 핵심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상처 난 아이들을 견딜만한 것으로 보듬어 안아주기 위해서 학교폭력을 바라보는 기존의 시각부터 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 마디로 "학교폭력을 원근법으로 바라보라"는 것. 학교폭력을 둘러싼 여러 가지 상황 중 멀리 있는 것은 멀리, 가깝게 있는 것은 가깝게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지금은 멀리 볼 줄 아는 시선도 없고, 가까운 문제의 핵심을 볼 줄 아는 능력도 없는 것 같다"며 정부와 경찰 등 제도권의 학교폭력 문제 해결 방법을 비판했다.

IMF 체제, 양육방식의 변형


▲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진 리들로프 지음, 강미경 옮김, 양철북 펴냄) ⓒ양철북

학교폭력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이 편집위원은 멀리 "IMF 체제 이후 변형된 양육방식"에서부터 찾아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 사회가 IMF를 거치면서 진 리들로프가 주장하는 '연속성 개념'(The continuum concept)이 가장 극명하게 깨졌다는 것이다. 리들로프는 책 <잃어버린 육아의 원형을 찾아서>(강미경 옮김, 양철북 펴냄)에서 아마존 예콰나 부족을 통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잃어버린 육아법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예콰나 부족 육아법은 한마디로, 가족, 또래 집단, 마을과 같은 인간관계, 그리고 아마존 밀림의 자연세계와 조금도 떨어지지 않고 연속적으로 이어진 것이기에 가능했다"며 "예콰나 부족의 아이들은 품성이 좋고, 화를 낼 줄 모르며, 타자에 대한 경계심이 없는 등 성숙한 인간관계의 기술을 자연스럽게 습득한다"고 전했다. 이어 그는 "인간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 즉 가족, 또래 집단, 마을, 자연세계와 조금도 끊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그러나 우리는 어떤가"라고 되물었다.

"IMF 이후, 엄마가 일하러 가면서 아이는 혼자 있게 된다. 실질소득은 감소하는데 사교육비를 대기 위해 일하러 나간다. 엄마들은 계산원·조리원 등을 하며 돈을 벌고, 아이들은 혼자 지내며 컴퓨터를 하거나 학원에 다닌다. 그나마 학원에 가야 아이들을 만날 수 있다. 연결고리가 다 끊어져 버렸다. 이런 사회에서 우리가 아이를 키우고 있다."

이런 그의 문제 인식은 책 <교육 불가능의 시대>(교육공동체 벗 펴냄)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IMF 구제금융 체제 이후에 사교육이 번성했다는 것은 비상한 의미가 있다"며 "오늘날 사교육의 번성은 부모가 먹고사는 일이 너무나 강파른 곡예가 되어 버린 현실과 그 개선의 전망이 불투명한 상황에서 '공부에서 밀리면 끝'이라는 절박한 공포감에서 연유한 것"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고등학교에 이어 초등학교, 중학교 교실마저 무너지고 있는 것은 많은 부분 학원과 과외에 시달린 아이들의 정서, 너무나 이른 시기부터 경쟁으로 내몰린 아이들의 스트레스와 이를 풀어내려는 충동의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며 "학교는 이제 보육(保育) 시설도 되지 못하고, 보육(保肉) 시설로 전락"했다고 비판했다.(23~24쪽)

학생 자살 문제에 덤덤한 이유

인생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긍정적이며 수용적인 존재로 생각하는 아이들이 지금 죽음으로써 가장 격렬하게 이 체제를 들이받고 있다. 지난해 12월 자살한 대구 중학생은 유서에서 "이제 여한이 없다"고 했다. 열네 살 아이가 '여한이 없다'고 하는 사회, 그러나, 그게 우리 사회에서 큰 문제가 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

이 편집위원은 "한국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자살 행렬은 인류사의 그 어떤 사회, 그 어떤 문화에 견주어도 어마어마한 사건인데, 유독 한국사회에서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다"며 우리 사회의 폭력 구조를 꼬집었다.

"밀양 송전탑 사건처럼 국가 폭력이라는 게 있잖아요. 사실 우리는 날마다 힘 있는 존재가 힘없는 존재를 끊임없이 착취하고 두드려 패고 배제시키는 것을 목격하며 살고 있어요. 조현오가 경기도 경찰청장이던 시절에 쌍용자동차 노조가 파업하고 있는 옥상에 가서 발암물질이 섞여 있는 최루액을 뿌리고 경찰 특공대 투입해서 노동자를 두드려 잡았잖아요." (<오늘의 교육> 3·4월호 56쪽)

지난 2월 22일 대구의 한 강연에서 그가 말한 "사회폭력, 국가폭력"의 한 단면이다. "우리 자체가 폭력적인 사회에 깊이 길들어 있어 이런 정도(학생 자살)의 폭력에는 덤덤"해진 이유를 말해준다. 이미 우리는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 폭력 과잉의 사회에서 조금씩 폭력적인 개체가 되어 버린 것이다.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

우리 각자가 폭력적인 개체가 된 상황에서 이 편집위원은 '무엇을 할 것인가' 보다 '무엇을 하지 말 것인가'를 고민하자며 "아이들을 위해 뭘 더 해보겠다고 나서지 말고, 차라리 우리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리스트화해서 하나라도 무의미하고 불필요한 억압의 목록을 지워 나가는 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거꾸로 해보자는 것이다.


▲ <학교 없는 사회>(이반 일리치 지음, 박홍규 옮김·해설, 생각의나무 펴냄) ⓒ생각의나무

그는 '학교화(化)'된 사회를 비판하며 '자율적 공생'을 외치는 이반 일리치의 <학교 없는 사회>(박홍규 옮김, 생각의나무 펴냄) 마지막 장에 예시된 에피메테우스에 주목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와 결혼해 상자를 열어버리는 바람에 인간에게 헛된 희망을 품고 살게 만든 신이다. 에피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훔쳐다 주었고 진보의 상징으로 이야기되는 형 프로메테우스와 달리 얼간이 취급을 받는 존재다.

그는 "일리치가 '에피메테우스'를 강조한 이유는 그의 이름처럼 '뒤를 바라보자, 나중을 생각하자'는 의미가 아닐까"라며 "그것은 우리가 옛날에 했던 것, 지금은 하지 않는 어떤 것을 통해 아이들 안에 있는 선한 어떤 것을 이끌어 내자는 주문"이라고 강조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서도 그는 "중요한 것은 근본으로 돌아가는 사유"라고 말했다. "어설픈 희망의 언사, 개선의 노력들, '그래도 학교가 희망이다'는 식의 언술은 그것의 현실적인 의미와 도덕적 가치를 떠나 이 교육 불가능을 치유 불가능한 상태로 악화"시킨다며 "아이슈타인이 말했듯이 '문제를 일으킨 그 마음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28쪽)고 단정했다.

'교육 불가능'은 '절망'과 '해방'의 양가적 감정

'교육공동체 벗'이 발행하는 <오늘의 교육>은 창간호에서부터 '오늘날 교육이 가능한가?'를 물었다. 암담한 교육 현실을 드러내는 것에서부터 논의를 시작하다는 외침이었다. '교육 불가능의 시대'라는 말을 들은 사람은 누구나 '맞다. 우리 교육 현장은 지금 교육 불가능이다'라고 공감했다.

이 편집위원은 '교육 불가능'이라는 말을 처음 썼을 때 '양가적인 감정'이 있었다고 했다.


▲ <교육 불가능의 시대>(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엮음, 교육공동체 벗 펴냄) ⓒ교육공동체 벗

하나는 '절망'. 아이들이 수업도 안 듣고, 학교를 졸업해도 더 이상 물질적인 유익도 찾을 수 없는, 대학 졸업장이 부도수표가 되고, 증권으로 치면 깡통계좌가 된 상황에서 여전히 입시 교육이 맹위를 떨치고 경쟁이 활개치는 것은 다만 사회적인 '아비투스(Habitus, 습관)'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는 "오늘날의 경쟁 교육은 다른 가능성이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아무런 물질적 유익에 대한 보장이 없지만 그저 다른 사람들도 다 하고 있기 때문에, 그냥 하는 습관"이라며 "그런 의미의 '교육 불가능'은, 절망과 체념의 의미"였다고 한다.

또 하나는 '해방적 측면'이다. 그는 "이제는 입시 교육을 하면 할수록 바보 같은 짓이라는 것이 너무 명백하다"며 "예전에는 아이들을 공부라도 시켜 대학에 보내 취직시키는 게 (내가) 교사라는 직업인으로서 할 수 있는 마지막 끈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이마저도 끊겼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하지 말고, 내가 믿는 바대로 해보자"는 생각으로, '교육 불가능의 시대'에 역설적인 해방의 공간이 열렸다는 것이다.

그는 단적으로, 자신이 살고 있는 밀양이라는 소도시의 산업공동화 현상을 예로 들었다. 대낮에 자전거를 타고 시내 상가를 돌아다니면 그 많은 시내 가게에 손님이 정말 아무도 없다며, 이미 지방 소도시에서부터 '공황'은 시작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우리 사회가 공황에 준하는 과도기"에 와 있기 때문에 그는 "교육하는 사람들은 과도기가 주는 해방적 측면, 아이들이 자면 굳이 깨워서 수학 문제 풀게 하지 않아도 되는 분명한 물질적 근거가 생긴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이 측면을 우리가 잘 이야기하고 언어화해, 사회에 의제로써 제출하고, 그 대안을 실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형편없는 체제, 역설적이게도 길이 있다

그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뭘까. 이 편집위원은 "일상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보는 눈과 행동, 그리고 언어"라며 "'일상의 재조직'이라고 하는 묵직한 화두가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일상의 재조직'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소공동체라고 생각한다. 이를테면, 합법화 초창기 당시의 전국교직원노동조합 분회가 양심적인 교사들의 학교생활과 일상을 조직해주었던 생활공동체였듯이, 학교의 교무실이든 아이들끼리의 학급이든 이런 소공동체의 형성이 결국 문제 해결에 있어서 관건적일 수밖에 없다. 그리하여 문제를 일으킨 아이들 곧장 혼내거나 징벌 체제 속으로 밀어 넣지 않고 이 문제를 차분하게 한번 응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리하여, 그 아이의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알 때까지 어떤 집행을 유예하는 것, 그리고 집행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의 종용을 버텨보는 것. 그리고 그런 말들을 같이 나눌 수 있는 동료, 또래, 공동체 등에서 이를 교육적인 언어로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교사들이 아이들을 위해 '형편없는 체제의 버팀목이 되어 달라'는 주문이다. 그러면서 그는 자기의 과오를 뉘우친 아이와의 만남이 "우리를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덧붙였다. 이는 "(학교폭력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아이들은) 대개 상처를 갖고 있는 아이이기 때문에 교육적 의미를 갖는 시선과 행동들이 비록 1%의 무게밖에 되지 않을지라도 99%의 상처를 들어 올릴 수 있다"는 데 근거한 것이다. 따라서 그는 "학교폭력에 대해 극심하게 느끼고 있는 지금의 무기력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교사로서의 내 주권, 부모로서의 내 주권을 되찾을 수 있는 길이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교육과정의 혁신적 재구성, 오후 3시부터는 '몸'을 쓰게 하라"

마지막으로 그는 대선을 앞두고 교육정책에 관해서도 이야기했다. "학교폭력을 풀어나갈 정책적 대안은 교육과정을 혁신적으로 재구성하는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는 "따돌림은 학교폭력의 바탕을 이룬다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자기도 따돌림당하는 게 두려워서 약한 아이에 대한 폭력을 모른척하거나, 가담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존 교육과정과의 단절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가해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이렇다. 짜증나고 재수 없는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를 아침 8시부터 밤 10시까지 열네 시간 동안 계속 한 교실에서 봐야 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것이다. 그런 부분이 따돌림을 구조화시키는 것이다. 이 아이들이 오후 3시가 되면 자연스럽게 헤어져서 가해자 A는 클라리넷 배우러 음악실로 가고, 피해자는 학교 농장에 일하러 가고, 가해자 B는 각각 농구클럽에 나가면 그 따돌림을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시간의 7/14가 줄어드는 것이다."

그는 또 "혁신의 진정한 내용은 교육과정의 재구성"이라며 "너무 급진적이라고 할지 모르지만, 김대중 정부의 교육개혁안이나, 참여정부에서 구상했던 '교육이력철'을 생각하면 그리 급진적인 것도 아니다"라고 말했다. 오히려 지극히 상식적인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서 그는 "이런 정도의 교육과정 혁신을 지금 문재인, 안철수 캠프에서 고민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여운을 남겼다.


▲ '교육공동체 벗'과 '알라딘'이 주최한 "누가 진짜 일진인가" 강연 모습 ⓒ교육공동체 벗

다음은 강연 후 진행된 일문일답이다.

질문 1. 주변에 교사가 여럿 있는데 무력감을 느낀다는 말을 많이 한다. 학생들의 속 얘기를 듣다 보면 무당 같은 생각이 든다고 한다. '그저 원(怨)을 달래주다 끝나는 것 아닌가'라는 회한이다. 그 순간에는 도움이 전혀 안 된다는 자괴감 또한 섞여 있다. 아이들에게 언제까지 견디라고만 말할 수는 없지 않나.

이계삼 : 학생들만 견뎌야 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교사들도 견디고 있다. 한 교사가 메일을 보냈는데, 주변 교사들에게 아이들을 장악하지 못 한다고 비난을 듣는다는 내용이었다. '장악'(掌握)이라는 말은 손바닥에 꽉 쥔다는 표현인데, 교육학에 없는 말이다. 학생을 장악한다는 것은 파시즘적인 발상이다.

어떤 면에서 보면, 선생님들은 아주 중요한 사상적 투쟁을 하고 있다. 몸이 아픈데도 집에 돌아가지 못하고 억지로 야자를 해야 했던 체험은 아이에게는 큰 상처가 된다. 자신의 절실한 바람을 '힘'에 눌려 유보했던 이들은 절실한 문제를 유보하는 일이 실제로 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힘센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밀고 나가는 것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심리적 기반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교사들은 두발이든 야자든 아이들의 절실한 바람을 존중해 주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중요한 반파시즘 투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이다.

나 역시 학교에서 '호구'로 지냈다. 교사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허용적인 태도는 다른 말로 '무능하다'는 말이다. 하지만 호구로 지낸 교사 생활 11년에 전혀 후회가 없다. 이 자리에 온 교사들에게 '저처럼 호구가 되어 주십사' 부탁하고 싶다. 또 같은 학년 안에 '호구 동맹'이 맺어졌으면 좋겠다, 야자가 되든, 두발이 되든, 학교라는 체제의 억압적인 것들로부터.

잘했다고 생각되는 것의 또 한 가지는 아이들이 자기 이야기를 많이 하게 했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민주주의는 원래 복잡하고 '불순물'이 많고 혼란스러운 것이다. 학교도, 학생도 민주주의가 되려면 늘 자기 말이 많고 다소 어지러운 상태여야 한다. 그게 정직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교사들이 그것을 못 견뎌 한다. 타인의 시선, 자기의 평가, 자기 에고의 문제다. 흔들린다는 것은 출렁이는 것이고, 굉장히 기분 좋은 교육적 의미를 담고 있다. 일사불란한 체제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에너지다. 그런 측면에서 오늘날 교사들이 좀 더 무능한 호구였으면 좋겠다,


질문 2. 딸이 6학년인데, 반에서 일어난 몸싸움을 아이가 경찰에 신고했다. 결국 당시 현장에 있던 학생들의 학부모가 경찰에 불려 가 쓴소리를 들었다. '학교폭력 신고하라'며 배운 대로 한 행동이지만, 그 일로 친구들에게 놀림을 당했다. 엄마 입장에서도 과연 옳은 행동이었는지 판단이 안 선다. 어떤 일이든 자기 자식에 대한 것은 상황판단을 하기 어렵더라. 부모로서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나.

이계삼 : 우리 아이도 지난 1학기 때 따돌림을 당했다. 그 반은 힘이 센 아이 중심으로 돌아갔는데, 아이가 그런 상황이 불편했는지 다른 반으로 도니까 힘이 센 아이가 따돌림을 명했다. 아이가 계속 아프다며 학교에 가기 싫다고 하길래, 어른이 개입해야 되느냐를 놓고 아내와 오랫동안 고민을 했다.

조금 더 가면 우울증 걸리는 것 아닌가 생각할 정도로 심각했는데 결국은 개입하지 않았다. 그 기간이 열흘 넘게 2주 정도 지나니 풀렸다. 아이도 견뎠고, 우리도 견뎠다. 나중에 알고 봤더니 힘이 센 아이가 해제를 명했다고 한다. 2주 동안 아이는 쉬는 시간에도 다른 반에 가지 못하고 교실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조증으로 보일 만큼 활발해졌다.

부모가 아이 상태를 직접 검사하려는 것은 안 좋다고 본다. 사실 말이지만, 오늘날 어른들도 조금씩은 다 ADHD(주의력결핍장애)가 있지 않나. 특히 스마트폰이 나온 이후로는 더 그렇지 않나. 그런데 아이가 그렇다고 낙인을 찍으면, 언어가 존재를 규정하게 된다.

부모 입장에서 아이에게 우울증이 생길 만큼 바라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지만, 아이도 그 과정을 견디면서 한 단계 성숙해졌다고 본다. 아이는 그 경험을 계속 기억하며 살 것이다. 이런 상처가 거세된 시공간을 상정해서 쉽게 가려고 피해 가려는 태도는 올바르지 않다. 사실 말이지만, 별로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그저, 지켜봐 주는 것이다. 지금 이 땅에서 교사로 부모로 지내는 시간은 기본적으로 고통일 수밖에 없다. 여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야 하고, 주고받고 공감하는 그 언어 속에서 다른 행동이 시작되는 것이다.

질문 3. 이계삼 선생님이 사직했다는 얘길 들었을 때 좋은 교사를 잃어 슬프다라고도 생각했지만, 좋은 학부모를 얻어 기쁘다라는 생각도 동시에 했다. 교사 생활 중 안타까웠거나 기억에 남는 일은?

이계삼 : 학교에 있으면서 교사 집단과 잘 안 맞았던 게, 교사성(性), 교사됨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다. 교사들은 늘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고, 자신 아닌 누군가를 탓하지만, 잘 듣다 보면 결국 자신이 '교사'라는 사실에 안도하는 이야기로 귀결되더라. 결국 현실이 어떻다, 교육이 어떻다 말하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안전한 정규직 교사'라는 계층적 안정감으로 귀결되는 것이었다. 그게 불편했다.

기억에 남는 일은 아이들하고 야자하면서 떡볶이와 오뎅을 먹던 시간이다.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그림을 참 좋아하는데, 슬프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하고, 그렇다. 여럿이 모여서 같이 먹는 게 그냥 좋다. 공자께서 말씀하신 '대동(大同)' 사회도 결국 '모두 모여서 함께 밥 먹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않나.


▲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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