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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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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제 : Die Blechtrommel.
원작 : 귄터 그라스 원 제 Die Blechtrommel. 79년작.
제작 : 프란츠 자이츠
감독 : 폴커 슐뢴도르프
음악 : 프리드리히 마이어, 모리스 자르
출연 : 다비드 베넨트, 모리스 자르, 마리오 아도르프, 알프레트 마체라트.
상영 시간 : 145분
수상: 32회 칸느영화제 황금종려상(IFF Cannes Palme d'Or) 1979, 독일 영화상(금상) 1979, 52회 아카데미상(외국어 영화부문)1980

1959년에 발표된 귄터 그라스의 소설 『양철북』은 전체가 3부로 구성된 작품으로 영화로는 감독 슐뢴도르프와 그라스가 공동 제작하였다. 원작자 그라스 자신은 각색 작업시 대사를 손질하는 일을 맡았고 영화화된 자신의 작품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던 것으로 전해진다.
대강의 줄거리는.....
1924년 독일과 폴란드의 접경지역인 단치히에 오스카라는 아이가 태어난다. 그러나 오스카의 어머니 아그네스의 두 남자 폴란드인 얀과 독일인 알프레드 중 누가 오스카의 아버지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두 아버지 사이에서 자 란 오스카는 3번째 생일을 맞은 날 어른들의 위선적인 모습에 대 한 반항의 표시로 성장을 멈추기로 결심하고 사다리에서 떨어진 다. 성장이 정지된 오스카는 생일선물로 받은 양철북을 두드리거나 괴성을 지르며 소동을 일으킨다. 오스카의 행동은 나치를 괴롭 히거나 어른들의 세상을 분열시키기도 한다. 한편 오스카의 악마 적인 요소는 어머니와 두 아버지를 죽음으로 내몬다. 결국 오스 카에게도 성(性)과 죽음이라는 두려운 문제들이 다가오는데….

* 영화 <양철북>의 시점과 아이의 시선
소설 『양철북』은 1인칭 화자의 서술구조(오스카는 나레이터이자 관찰자이다)를 지니고 있다. 영화 『양철북』에서도 역시 1인칭 화자인 오스카의 역할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은 오스카가 전후 사정을 설명해 주는 친절한 해설자와는 구별되는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오스카는 해설자이기에 앞서 주의 깊은 관찰자이다. 슐뢴도르프는 영화에서 이 관찰자의 시선을 영상으로 개입시킨다. 따라서 영화 속의 장면들은 전체의 반 이상이 3살 짜리 꼬마의 시점에서 본 어른들의 세계이다. 외할머니의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각 장면들을 연결시키는 나레이터의 목소리도 꼬마의 당차고 기괴한 목소리이다. 오스카의 일상생활에서는 말더듬이 수준에서 머물 정도로 말이 없지만 나레이터로서는 어른들을 능가하는 능력을 과시한다.
그런데 나레이터보다 더 강력하게 영화의 시점을 조절하는 것은 오스카의 시선이다. 오스카의 시선은 소시민 근성을 여지없이 드러내는 어른들의 추태에 집중되고 있다. 위를 올려다보는(개구리 시선) 어린아이의 시선은 눈에 잘 안 띄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더 가까이에서 포착할 수 있다. 그의 냉정할 정도로 날카로운 시선은 어른들이 겉으로 우아하고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점잖고 격식을 차리고들 있지만 사실은 너나 할 것 없이 성적인 충동에 사로잡혀 이중적으로 행동하며 오로지 자신이 원하는 것에만 집착하는 이기주의적인 속물에 지나지 않음을 여지없이 폭로한다.
결국 인간의 치부를 수치스럽게 드러내는 현실에 대해 역겨움을 느낀 오스카는 할머니의 네겹 치마 속으로 다시 숨고 싶을 뿐이다. 이렇게 다시 모태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은 어머니의 자궁으로부터 다시 나오는 순간에도 겪는다. 태아가 세상에 머리를 내미는 순간 아버지 마체라트의 소시민적인 반응이 그로 하여금 역겨움을 느끼게 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어른을 능가할 정도로 냉철하고 비판적인 사고력을 가진 오스카는 동시에 어린아이의 순진하고 유치한 천성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세 살이 되면 양철북을 선물로 주리라는 아그네스의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 그만 세상 밖으로 나오고 말았다는 식의 유아식 논리는 이 영화의 전편을 지배하는 유머이기도 하다. 출산 장면에서도 카메라 시점은 태아의 시선과 일치한다. 180도 뒤집어진 상태로 처음 세상을 대하는 아기처럼 카메라 앵글도 180도 회전한다. 카메라가 대부분 오스카의 시점에 맞춰져 있다는 것은 초반부에서부터 암시되고 있다. 출생시 자궁으로부터 바라보는 세상, 생일날 파티 탁자 밑에서 직시하게 되는 어른들의 은밀한 성적 유희, 권위적으로 강요하는 어른들에 맞서 반항하기 위해 소리를 질러 시계유리를 깨는 장면 등에서 보여지는 개구리의 시선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소설의 배경이 단치히로 설정된 것은 우선은 원작자인 그라스의 실제 고향이라는 점을 들 수 있다. 소설 <양철북>은 단치히에서 독일인 아버지와 캬슈바이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작가 그라스의 자전적인 체험이 기본 소재가 되고 있다. 그 밖에도 이 영화의 시대적인 배경이 2차 대전을 전후로 하고 있으므로 그 시발점이 되었던 곳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되는것은 우연이 아니다. 단치히는 오랫동안 슬라브 원주민, 독일인, 폴란드인, 유태인 등 여러 민족이 공존해 왔던 도시로 따라서 민족간의 갈등과 정체성 문제가 항상 쟁점의 대상이 되었고 나치가 2차 대전의 포문을 열어서 전도시가 파괴되어 전화를 입은 것은 비롯해 이 시대의 다양한 문제점을 한 몸에 끌어안고 있던 곳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오스카의 이미지가 소시민의 속성에 대한 알레고리로서 나타나고 있는 것은 그라스의 원작에서 출발한다. "오스카 마체라트는 소시민 계층 안에서 소시민 계층의 일부로서, 또 소시민 계층의 메가폰으로서 발언하는 인물이다". 슐뢴도르프는 이런 오스카의 소시민적 속성에 천착하면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현 사회에 대한 시사성에 비중을 두고 있다. 오스카 마체라트는 독일의 전형적인 소시민의 속성을 보여준다. 불평이 많고 냉정할 정도로 이기적이면서 기회주의적이다. 물론 그의 경우는 아이라는 이유로 모든 것이 허용된다. 오스카가 주변의 어른들을 모방하면서 재현하는 왜곡된 모습에서 분명해지는 것은 어른들의 행동 역시 아이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결국 아이가 모방하는 것이 아이보다 더 유치하게 행동하는 어른들의 태도라는데 이 작품의 아이러니가 있다.
오스카의 거부적인 행동은 그의 항의와 저항을 보여주지만 오스카는 그가 생각하는 만큼 영웅적이지 못하다. 주의환경의 부조리와 모순을 직시하긴 하나 영웅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에 맞서 저항하고 투쟁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독일 파시즘이 성공할 수 있게 도와준 소시민 계층의 근시안적이고 비겁한 태도를 그대로 보여준다. 오스카의 이런 이중적인 속성은 그의 목소리를 상징하는 양철북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독일 소시민층의 보수성향은 1차대전의 패배로 인하여 국수주의적인 경향으로 드러나게 된다. 우선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궁핍한 생활이 주범이었고 이로 인해 생존이 위협받자 소시민들의 민족주의적 방어태도는 더욱 급진적으로 변했다. 사회주의자인 귄터 그라스의 입장으로 볼 때 이들이 가진 의식이 탐탁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다. 반 유대주의와 새로운 질서라는 파롤을 표방하고 나선 나치는 이들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트로츠키가 "파시즘의 순수한 토대는 소시민층에 있다"고까지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은 나치가 소시민적 분노와 절망을 얼마나 잘 이용했나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라스의 눈에는 이들의 행동이 광대모자를 쓰고 양철북을 두드려대며 자신의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미숙아 오스카로 보였을 것이다. 즉 나치이데올로기에 현혹된 소시민 계층이 알레고리로 형상화되고 있다.
이런 것은 당시의 시대상뿐만 아니라 문화적 동기를 설명해주는 요소이다. 그러나 이런 문화적 또는 이데올로기적 동기는 그 자체로 영화/예술의 본질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폭력이라는 분위기에 의해 더욱 적나라하게 모습을 보이고 강화된다. 이 영화는 외설시비에 말려들 만큼 아주 기괴한 장면들을 많이 담고 있다.
1) 주거건물 안뜰에서 개구리를 삶은 냄비에 오줌을 누고 그것을 오스카에게 억지로 먹이며 즐거워하는 아이들은 그 모습이 천진한 만큼 당시 인간 속에 숨어있는 잔인함을 그로테스크하게 그려내고 있다. 더욱이 오스카를 괴롭히는 아이들은 같은 계층의 아이들이었으며 그것도 모자라 집단적이었다는 사실이 소시민의 폭력성을 더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영화에서 한 장면은 곧 전체를 말해준다. 이것이 문학과 다른 요소이다. 문학에서는 일반적으로 설명을 하지만 영화에서는 한 이미지를 통해 전체의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2) 야채상 그레프는 소년들에게 각별한 애정을 보이는데 오스카가 3살 되던 날 키를 잰다. 오스카를 문틀에 기대게 하고 키를 표시하기 위해 단도를 끄집어 낸다. 나무 기둥에 단도로 금을 긋는 순간은 히틀러가 유겐트를 부르는 장면과 흡사하다.
3) 오스카의 시선에 나타나는 성애의 장면은 아름답거나 서정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추잡하고 동물적이고 폭력적으로 묘사된다. 이런 장면을 대하면서 우리는 문학과 예술에 시대적 변천도 고려할 수 있어야 한다. 다시 말해 서정 자체가 더 이상 우리에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그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것은 닫힌 사고를 하기 때문이다.
4) 마체라트의 식구는 바닷가에서 뱀장어를 잡는 광경을 목격한다. 낭만적 회화를 연상시키는 아름답고 평화로운 수난절 금요일의 바닷가 풍경은 인간의 그로테스크한 행위를 통해 더욱 역겹게 나타난다. 수난절이기 때문에 아마 물고기를 먹어야 했을 테고 그 물고기를 위해 말머리를 사용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바다 낚시꾼에게 호기심을 가지고 다가선 이 식구들은 바다에서 건져낸 것이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끔찍한 죽은 말의 머리인 것을 보게되고 그것을 파먹은 살찐 수십 마리의 뱀장어들을 목격한다.
1차 세계 대전 때 말의 시체뿐만 아니라 전사한 영국군들의 시체 덕분에 뱀장어들이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살쪘다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낚시꾼과 아버지 마체라트는 우글우글 기어나오는 뱀장어를 신이 나서 감자 부대에 집어넣는 것을 보고 아그네스는 구토하고 만다. 그러나 오스카는 냉정하고 무감각하게 뱀장어 머리를 자르는 옆에서 빵을 뜯어먹고 있다.
5) 알프레드 마체라트는 이 뱀장어를 요리해서 싫다는 아내에게 억지로 먹이려 하자 아내는 거부하면서 피아노를 발작적으로 친다. 그 피아노 곡이 '마탄의 사수'인 것을 보면 아그네스가 그의 남편에게 노골적으로 대항한다는 함축적인 뜻이 들어 있다. 또한 아그네스를 위로한답시고 방으로 들어선 애인 얀이 신을 향해 빌고 있는 마리아 막달리아 초상화 앞에서 한 차례 성으로 달래주자 아그네스는 냉정을 되찾고 그 뱀장어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뱀장어는 그라스의 그림에서도 자주 표현되고 있지만 남성의 성기를 상징하고 있다. 따라서 마체라트의 행위는 (뱀장어를 억지로 먹이려는 행위) 강압적으로 성적 폭력을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을 역겨워하는 것은 그에 대한 저항이다. 나중에 아그네스가 생선 폭식증으로 가는 것은 불륜관계를 맺고 있는 얀과의 욕구를 마음대로 채울 수 없음을 나타내 주고 있다. 결국 오스카의 말대로 "생선을 너무 많이 먹어서 죽게 되는" 아그네스는 폭력의 희생물이다.
결국 귄터 그라스가 이 소설/영화를 통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독일인의 소시민적 이기주의다. 시대의 변화를 무비판적으로 따라가며 빵에 의해서 좌우되는 그들, 이들은 나치에 무조건적으로 협력하는 알프레드 마체라트와 크게 다를 바가 없다.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1858596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 당신 것일 수도...
[다시 보는 영화] 진짜 어른으로의 성장기, <양철북>
13.04.27 10:14l최종 업데이트 13.04.27 10:14l유정아(heydev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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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양철북> 오스카의 부모 마체라트와 아그네스, 그리고 아그네스의 애인인 얀의 모습. 오스카는 주변 사람들의 거짓과 위선을 견디지 못하고 성장을 멈춘다.
ⓒ Franz Seitz Fi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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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정치적 격변기에 중립을 지킨 자를 위해 예비되어 있다.

단테의 이 유명한 말은, 중간적 입장에 선 자에 대한 인간의 태도를 명확하게 드러낸다. 여기서 말하는 중립이란 중도적 정치관이라기보다는 '중립을 표방한 방관'의 개념에 가깝다. 지옥에 떨어진다는 저주를 받을 정도로, 사태를 지켜보기만 하는 태도는 언제나 경멸적인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방관자는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오히려 시대를 주도하는 세력간의 대립이 극렬한 시기일수록 그들의 존재는 더 뚜렷이 부각되었다.

그러다 보니 사회적 격동기를 다루는 작품들에서는 방관적인 성향의 인물이 반드시 등장한다. 그들을 둘러싸고 설정된 상황은 작품마다 다르지만 어느 이야기에서나, 대개 줏대 없고 겁이 많은 인간으로 묘사된다는 점은 공통적이다.

이야기 속에서 이들은 눈치를 보며 참여를 회피하고 사태를 관망하다가, 마지막 순간 유리한 쪽으로 움직인다. 방관적인 태도의 근본적 원인을 개인의 성향에서 찾고 있는 것이다. 이 논리에 따르면 방관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비겁한 성격의 결과이고, 방관자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이 전혀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독일 영화 <양철북>(1979년)은 이 논리구조를 뒤집는다. 직접 참여를 회피하는 태도가 위험하다고 보는 시각은 같지만, 이 영화는 어떤 성향의 사람이 방관자가 되는지를 섣불리 정해두지 않는다. 대신, 방관을 선택한 평범한 인간이 어떻게 변해가는지를 보여주며 관객에게 그 위험을 생생하게 경고한다.

'더 자라고 싶지 않아!'... 아이의 몸을 선택한 오스카


▲ 영화 <양철북> 단치히에서 나치의 대규모 집회가 열리는 날. 오스카는 무대 뒤에 숨어 양철북을 두들기고, 그 탓에 악대가 엉뚱한 음악을 연주해 집회는 엉망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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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2차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의 폴란드령 단치히를 배경으로 전개된다. 다양한 민족이 뒤섞인 이 도시에서, 주인공 오스카(데이비드 베넨 분)는 독일인 마체라트와 카슈비아인 아그네스의 아들로 태어난다. 그는 많은 사랑을 받으며 자라지만, 부모와 주변 어른들의 위선적인 행위를 하나 둘 목격하면서 차츰 어른의 세계에 환멸을 느낀다.

결국 그는 더 이상 자라지 않기를 선택하고 높은 층계에서 스스로 뛰어내린다. 이 시도는 성공을 거두어, 오스카는 계속 아이의 몸으로 남는다. 비겁한 성격 때문이 아니라, 현실에 대한 혐오를 이기지 못해 세상에 들어가기를 거부한 것이다. 이는 기존의 '기회주의적 방관자'들과 분명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이 구분을 더욱 뚜렷하게 하는 요소는 그의 양철북이다. 오스카가 늘 메고 다니는 조그만 장난감 양철북은 두드리면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이는 그가 방관자의 입장에 있음에도,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여전히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어른이 되는 것은 거부했지만, 영화의 초반부에서 오스카는 특기인 고음과 양철북을 통해 세상에 대한 그의 불만을 뚜렷하게 표현한다. 높은 소리를 질러 유리창을 깨뜨려서 부모의 불륜행위를 방해하거나, 양철북을 시끄럽게 두들겨 나치의 집회를 엉망으로 만드는 식이다. 주변의 문제에 대한 의식이나 용기가 없이, 일신의 안위만을 위하던 기존의 방관자와는 확연히 다른 노선을 취한다.

하지만 그런 차이에도 결과에는 변화가 없다. 그의 양철북 소리는 현실을 조금도 바꾸지 못했다. 오스카의 생모인 아그네스는 내연남의 아이를 임신한 채 스스로 목숨을 끊고, 나치는 단치히에 당당하게 입성한다. 제아무리 성숙한 의식을 가지고 있어도, 그가 '아이'라는 방관자 입장에 서 있는 한 별다른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것이다.

이 괴리는 시간이 지나 오스카의 내면이 성장함에 따라 더욱 커지고, 그의 갈등도 깊어진다. 아이의 몸을 택함으로써 어른이 감당해야 할 책임에서 벗어나는 데는 성공했지만, 대신 스스로 느끼는 어른의 감정은 누구에게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방관자의 삶, 결국 아무것도 지켜내지 못하고...


▲ 영화 <양철북> 자라지 못한 어른이라는 동질감에 난쟁이 서커스단과 금방 가까워진 오스카는, 곧 그들을 따라 독일군 위문공연단에 합류한다. 양철북은 나치를 즐겁게 하는 오락물로 전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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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괴로움에 시달리던 오스카는 우연히 난쟁이 서커스단을 만나고, 곧 그들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그는 짧은 시간에 그들과 가까워지고, 급기야 자신이 과거 나치를 혐오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서커스단이 운영하는 독일군 위문공연단에 합류한다. 한때 나치를 방해했던 양철북 소리는, 삽시간에 그들을 즐겁게 하는 오락물로 전락한다.

이 모습에서 우리는, 행동으로 표현되지 않은 문제의식이 얼마나 취약한지 알 수 있다. 방관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유는 남달랐지만, 결과는 다를 바가 없다. 분명히 사태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현실에 뛰어들기를 거부했던 오스카는, 결국 누구에게도 그의 불만을 인정받지 못해 갈등하다가 시류에 휩쓸린다. 그 결과 그는 초기의 신념도, 주변 사람들도 지켜내지 못했다.

위문공연단으로 오랜 기간 각지를 떠돌던 오스카는 전쟁의 끝 무렵 사랑했던 여인을 폭격으로 잃은 채 고향으로 돌아오고, 집에서 종전을 맞는다. 곧이어 승전국인 소련의 군대가 들어와 도시의 나치 잔당을 수색하고, 열렬한 나치당원이었던 오스카의 아버지 마체라트는 허겁지겁 과거의 흔적을 지운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오스카는 무언가 결심한 듯이, 소련군 앞에서 마체라트의 손에 나치의 배지를 쥐여준다. 이는 이야기 내내 자행된 위선과 거짓의 행위들에 대해, 오스카가 취한 가장 직접적인 행동이다. 이 행동으로 인해 마체라트는 소련군에게 목숨을 잃는다.

영화의 말미, 폐허가 된 공동묘지에서 마체라트의 장례식이 진행된다. 오스카는 메고 있던 양철북을 아버지의 초라한 무덤 속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 이제, 다시 성장하기로 마음먹는다. 방관자의 자리에서 벗어나, 세상에 직접 뛰어들기로 결심한 것이다.

이제 당신이 '양철북'을 내던져야 할 때


▲ 영화 <양철북>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오스카는 아버지의 무덤에 양철북을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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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방관적인 태도를 지적하는 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현실 참여의 결여가 가져오는 위험까지를 경고한다. 어떤 사건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불만을 표현하더라도 직접적인 사회참여를 병행하지 않으면, 그 결과는 기회주의적인 방관이 가져오는 그것과 차이가 없는 것이다. 불만은 높아지지만 변하는 것이 없다. 그래서 더 위험하다.

이는 영화 안에서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우리 주변에도 실재하는 일이다. 과거에 비해 불만을 표출할 기회와 수단이 무한히 늘어나고, 우리 사회가 가진 문제를 의식하는 수준도 높아졌지만 변화를 위해 직접적인 행동에 나서는 사람은 소수다. 그렇기에 모두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아는 현실조차, 여전히 쉽게 바뀌지 않는다.

불만족은 변화를 위한 움직임의 불씨다. 그러나 '만족스럽지 않다'는 기분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바꾸고자 한다면 직접 나서야 한다. 지금 자신을 둘러싼 상황에 만족하지 못하면서도 변화를 위해 나서는 것은 머뭇거리는 이들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그리고 이제 목에 건 '양철북'을 내던지기를, 진짜 어른으로 성장해 세상에 당당하게 뛰어들기를 바란다.

* 너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7-02-12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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