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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저주8] 고졸청년 김슷캇의 '가짜 노동자' 유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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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저주8] 고졸청년 김슷캇의 '가짜 노동자' 유랑기
입력 : 2012-04-16 16:06:33ㅣ수정 : 2012-04-18 11:37:56

인생 귀찮죠? 리셋하시죠.
인생역전요? 리셋하세요.
헛되게 살아온 것 같죠? 정답입니다!.
그리고…
뭘 하든간 하지 마라.


By 김슷캇

이번에는 ‘가짜 노동자’다. 노동을 하면서도 노동의 결과물로부터 끊임 없이 소외되는 운명을 가진 ‘가짜 노동자’들, 그러한 직군의 산 증인인 김슷캇(본명 김성일, 32세)를 만났다. 김슷캇은 1998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당구장 알바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구공을 닦고 초크 놓는 일을 했다. 경기 불황이 본격화한 외환위기 직후에 군대에 갔다. 전방 GOP에서 국가의 녹을 받으며 체력을 키운 김슷캇은 제대 후 골프장에 취직한다. 캐디(라 쓰고 캐디뿐 아니라 도어맨, 주차 요원, 각종 잡무 담당이라 읽는다) 일을 하며 필드를 누볐다. 그러나 인격적 모멸감과 함께 해고당하고…

여기서 끝이 아니다. 김슷캇은 물류센터에 취직한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일하던 센터가 문을 닫자 하청업체이던 물류센터에서 또 다른 하청업체로 옮겨간다. 일명 ‘위장도급’. 유령 노동자 신분으로도 열심히 일해 보려고 했지만 황당한 이유로 해고되고 또 다른 유령인 대필작가가 된다. 이후에도 노동한 결과물로부터 소외되는 각종 가짜노동이 간간이 이어지고, 결국 ‘탈배제 강령’을 내세운 소수정당의 당직자 자리에 안착하는데…

이제 고생 끝, 안정 시작? 천만에. 덕후위원회 위원장 등 김슷캇이 정규직 당직자로서 책임 있는 역할을 맡아 오던 정당이 문을 닫았다. 조금 더 큰 진보 정당으로 흡수 통합된 것. 배제로부터도 배제된 ‘가짜 노동자’(열악한 조건에서 일하는 각종 알바 및 비정규직과 특수고용직 등)에서 벗어난 것으로 보였던 그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저주와 분노 레벨이 높은 청년들을 만나는 여덟 번째 시간. 고등학교 때까지 또래 학생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인생행로가 이후 불안정 노동으로 귀결된 것은 우연일까 필연일까? 불안정 노동의 산 역사, 그러나 알고 보면 능력자 ‘덕후’인 김슷캇을 만났다. (김슷캇이란 이름에는 아무 의미가 없다. “읽을 수 없는 이름을 만들었다가 그것을 읽을 수 있는 방법을 찾았을 뿐”이라는 설명.)



직장이 사라지는 날

-어디에서 오시는 길이에요?

오늘 사회당 마지막 당 대회 있는 날이라서 거기에서 왔어요. 진보신당과 합당 논의가 마무리되는 날이죠. 정확히 말하면 진보신당과 합당하기 위한 수인기구설치를 논의하는 건데 그게 설치되고 나면 뒤집기는 어렵죠.

4년여간 몸담았던 정당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날,
김슷캇은 선약을 지키러 마지막 당 대회 중간에 나와 인터뷰에 응했다.

-사회당에서 원래 어떤 일을 하셨어요?

서울시당 연대사업국장이었어요. 꼭 연대사업을 하는 건 아니고 기본적으로 그냥 당직자죠. 투쟁사업장과 어떻게 연대할지 기획하고 같이 연대하고 그런 일을 하는 거죠. 그 이외에, 음, 봉투 붙이기도 하고요. 당원들에게 소식지 같은 것을 보낼 때 발송작업을 다 같이 하는 거니까요. 글을 써야 하는 상황이 오면 쓰기도 하고 당 대회가 있으면 당원들에게 전화도 하고요.

-언제 사회당에 들어갔어요?

2008년이요. 어떤 당원의 글 때문에 입당하게 됐어요. 처음에는 일반 당원으로 들어갔고요. 글 읽고 관심 두다가 강령을 읽고 당의 시각 자체에 설득됐죠. 강령 자체가 ‘탈배제 강령’이라고 해서 그 전문을 보면 ‘경제적 배제, 사회적 배제, 그것들을 다 없애야 합니다’ 이런 내용이 나오거든요. 배제된 삶을 산 입장에서 그 강령이 가슴에 와 닿을 수밖에 없었죠.

-민노당같이 다른 진보정당도 있는데 왜 소수정당인 사회당이었나요? 그런 쪽으로 정치적 각성이 된 계기가 있었나요?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사실 처음에 당 활동을 시작했을 때에는 사람들이 (입당 계기를) 물어보면 대충 어떻게든 만들어서 얘기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딱히 그런 건 없었던 것 같거든요. 처음 당원이 되었을 때에도 당에서 일하거나 그런 것도 아니었고. 그냥 주변에서 얘기들은 들었는데 당 홈페이지에서 강령을 읽고 좋다라고 생각을 한 게 컸죠. 그런데 그 때는 당직자가 될 거라고 생각도 못 했어요. 일단 먹고 사는 데 바빴고요.

고졸 청년 ‘가짜 노동자’ 경험사 1.
당구장 알바, 그리고 골프장의 유령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진보정당으로 유입되는 경로와 다른 것 같아요. 흔히 대학 생활하면서 정치적으로 각성하거나 선배 따라 ‘운동’을 하면서 관심을 두게 되거나 그런 식으로 진보정당에 들어가는 게 젊은 세대에게 일반적인 경로잖아요. 슷캇 씨는 혼자서 알아서 찾아간 거네요. ‘탈배제’에 꽂힌 계기를 제공한 사전 경험이 있는 건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먼저 듣고 싶어요. 일단 대학에는 안 갔다고 하셨죠?

안 간 게 아니고 못 갔어요. 공부를 못했으니까. 성적이 안 됐거든요. 게으르기도 했고 미래에 대해 별로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고요. 물론 집에서는 그런 (압박 같은) 게 있었죠. 그런데 귀찮음이 더 먼저라서. (웃음) 어쨌든 공부하기는 귀찮았고요. 수능을 치기는 쳤어요. 그런데 원서를 넣을 데가 없었죠.

-요새는 공부를 안 해도 또는 못해도 사실 가려고 마음먹으면 갈 수 있는 대학이 많이 있잖아요.

그러려면 돈이 필요하죠. (웃음) 제가 공부를 안 한 이유가 딱히 있었던 건 아니고요. 그냥 무감각하다고 해야 하나? 중고등학교 때 책 읽는 것을 좋아하기는 했는데 그게 성적에 도움이 되는 것은 끽해야 국어 하나 정도니까… 학교 때 국어는 잘했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뭐 했어요?

처음에는 당구장에서 일했어요. 동네 당구장 가게 보는 일이요. 돈 받고 공 닦고 초크 놔주고 그런 것. 그다음에는 짧게 짧게 아르바이트를 했어요. 그러다가 군대에 갔죠. 98년이었던가? IMF 외환위기 직후에 갔는데 그래서 입대 경쟁률이 꽤 높았어요. 저도 지원해서 간 거였고요. GOP로 가게 됐죠. 철원에서 근무했어요.

-전방에서 세게 군 복무를 하고 돌아와서는 뭘 했죠?

골프장에서 일했어요. 남자 캐디로요. 골프를 칠 줄 아는 건 아니었는데 그건 상관없었어요. 캐디 일이란 게 경험에 따라 되는 거라 자기가 (골프) 실력이 있지 않더라도 계속하다 보면 익숙해지거든요. 드라이버를 잡을 때 어느 홀에서는 조금 왼쪽으로 쳐라, 퍼팅할 때 홀컵을 지나가는 기분으로 쳐라 등등 싱글급 골퍼에게도 조언할 수 있어요. 골프장의 모든 홀을 통째로 외워버리니까.

-캐디가 수입이 괜찮죠? 얼마나 일했어요?

한 2년 정도요. 수입은 괜찮은 편이긴 한데, 사실 캐디를 해서 돈 벌어 나가는 경우는 흔치 않아요. 일 자체가 힘들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요. 그리고 캐디가 말 그대로 ‘특수고용직’이라서 굉장히 안 좋아요. 특수고용이라는 게 사실상 고용된 게 아니라는 얘기죠. 그러니까 노동권 자체도 안 좋고. (특수고용직은 계약 형식상 자영업자이지만 실제 일하는 행태는 기업에 고용된 노동자와 유사한 직업군. 골프장 캐디, 보험설계사, 레미콘차량 운전사, 방송구성작가, 퀵서비스배달원, 학습지 방문교사, 외근직 A/S근무요원, 판매원 등이 특수고용직에 해당. 법적 지위가 노동자가 아니라 개인사업자라는 이유로 대부분 노동법과 사회보험의 사각지대에 방치돼 있다.)
캐디도 학습지노동자처럼 개별사업자로 분류되니까요. 그러니까 골프장이 영업장을 내주고 거기에 캐디가 사업자로 들어가서 이익이 생기면 나눠 먹는 구조예요. 지금도 그럴 거예요. 캐디가 어차피 캐디피(fee)를 버는 건데 그 캐디피가 그냥 그 사람이 일해서 얻는 수입인 거죠.

-군 제대를 하고 2년 동안 사업자로 일한 거네요. 캐디는 왜 그만두게 됐어요?

인격적인 모멸감 때문에요. 골프 치러 오는 사람들에게서 (모욕을) 많이 받을 거라고 예상하겠지만, 실제로는 그것 외에 골프장으로부터 받는 모멸감이 더 커요. 골프장에서 캐디들을 부려 먹는 수법이 있어요. 예를 들면 무임금노동이 되게 많아요. 이게 말도 안 되는 논리인데 쉽게 말하면 골프장 측은 이렇게 말하는 거죠. “여기가 너희 영업장 아니냐. 그러니 영업장에 문제가 생기면 너희가 책임져야 하는 거 아니냐.” 그러니까 겨울 같이 눈 오고 그럴 때에는 골프장이 사실 한동안 닫는 거고 캐디는 돈을 못 버는 건데도 그 기간에 나와서 캐디들이 준비작업을 하는 거죠.

-보수 없이 일하는 거네요.

골프장 측에서 그런 논리로 한 푼도 안 줘요. 사전 준비작업 외에도 캐디들이 해야 하는 일들이 많이 있어요. 도어맨, 주차 도우미, 그런 것도 캐디가 하는데 그런 노동에 대한 댓가는 없죠. 그리고 참 재미있는 게 지각이나 결석을 꼭 체크해요. 벌금을 물리진 않지만, 벌점을 줘요. 벌점이 쌓이면 당번을 서고요. 당번을 서면 그 시간에는 돈을 못 버는 거죠. 일단 지각 한번 하면 12시간 정도 (당번 일을) 한다고 보면 되는데 한번 그렇게 되기 시작하면 계속 그런 ‘벌당’만 서다가 그만두기도 하고. ‘벌당’은 ‘벌칙 당번’의 줄임말이에요. 온종일 캐디 일이 아닌 일반 관리 업무에 동원되는 거죠. 손님 맞고 주차하고 잔디 고르고 그런 일들. 여하튼 이걸 2년 동안 했어요. 딱히 다른 직장이 없었으니까.

고졸 청년 ‘가짜 노동자’ 경험사 2.
대기업의 유령 – 위장도급


-노동권도 열악하고 인간적 모멸감도 심하고 그래서 캐디 일을 그만두고 물류센터로 직장을 옮겼죠. 건장한 체구답게 체력이 좋아야 하는 일들을 주로 하셨네요.

체력은 그렇게 좋지 않아요. 이건 그냥 살이 찐 거고요. 물류센터에서는 운전하면서 배달하는 일을 한 건 아니고 센터에서 일했어요. 지게차를 몰지는 않았어요. 지게차 운전사가 따로 있고요. 저는 지게차 파레뜨로 운반하는 일을 했어요. 지게차가 옮길 수 있게 밑에 파레뜨에다가 물건들을 깔아서 운반하고 그런 걸 많이 했죠. 그때가 일하기가 제일 편했어요. 정신적으로 편했으니까요.

-캐디로 2년 일하고 물류회사에 간 건데, 벌이는 어느 게 나았어요?

벌이는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요. 캐디가 일당은 더 세다고 해도 무임금 노동이 있으니까요. 그리고 장마 때나 겨울에 눈 올 때나 (벌이가) 사실 없는 거라서. 물류회사에 가서는 벌이가 고정적이고 부당한 대우도 적은 편이었어요. 그렇죠. 부당한 대우 같은 건 확실히 적었어요. 인격적으로 모멸감을 느낄 일이 별로 없었죠. 고용주와 맞닥뜨릴 일도 별로 없고요. 물론 기본적으로 (정당한 대우가) 아닌 것들은 있죠. 정규직 전환 약속이 지켜지지 않는다거나 그런 것들.

-얼마나 일했는데요?

거기에서 한 9개월 정도 일하다가 그 창고가 문을 닫게 됐거든요. 그래서 비슷한 계열로 옮겨가게 됐어요. 그게 재미있는 게 하청회사에서 다른 하청회사로 옮겨간 거였어요. (웃음) 동일 노동을 하고 있는데 소속은 그 회사가 아니었던 거죠. 굳이 따지자면 위장도급이었고. 그러니까 도급으로 인정이 안 되는 도급이었던 거죠. 그 당시에 옮겨간 곳이 ‘M&M’이라고 실제로는 국내 굴지 대기업 일을 하는 곳이었는데 소속은 그 대기업이 아니라 ‘M&M’인 상황이었죠. 회사는 유령 같은 곳이었지만 회사주인은 ‘맷값 폭행 사건’으로 떠들썩하게 유명세를 누렸죠. 여기에서는 조금 안 좋게 끝이 났어요.

-해고당한 거예요? 어떤 이유로?

그게 참 재미있어요. 머리를 기른다고 해서 잘렸어요.


머리 길다는 이유로 해고당한 김슷캇

-무슨 일을 했길래 머리가 길다고 잘려요?

그것도 참 재밌는 게 거기가 SK 휴대폰 가입자 서류들 물류창고였어요. 심지어 보안카드 없으면 안에 들어가지도 못하는 그런 데였어요. 그러니까 아무도 안 보는 데에서 일하는 건데 머리가 길다고 잘린 거죠. (웃음)

-진짜 그 이유로 잘린 거예요? 거기에서 얼마나 일했어요?

거기서는 얼마나 일했는지 잘 기억이 안 나요. 그렇게 오래 하지는 못했어요. 아무튼, 딱 그것 때문에 잘렸어요. 머리 길다고요. 머리를 자르라거나 그런 통보 없이 그냥 잘렸죠. 그전에도 그런 식으로 잘린 사람이 있었어요.

-물류창고에서 머리 길다고 잘린 사람이 또 있어요?

길다고 잘린 건 아니고요. 염색했다고 잘렸죠. (웃음) 일하는 태도가 아니라는 거죠. 사실 어디에서 자른 건지도 잘 모르겠어요. 실제 소유주인 대기업이 자른 건지 유령 하도급업체가 자른 건지.


2010년 11월 SK본사 앞, 항의 퍼포먼스 중인 김슷캇. 당시 SK 그룹 창업주의 사촌 동생이자 물류회사 M&M의 전 대표 최철원 씨가 SK본사 앞에서 고용승계를 요구하며 1인 시위를 벌인 탱크로리 화물차 운전기사 유 모(53) 씨를 알루미늄 야구 방망이로 구타하고 맷값을 건네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과거에 M&M에서 일했던 김슷캇은 항의의 뜻으로 SK 본사 앞에 가서 재벌 2세의 맷값 폭행을 재연하고 이렇게 외쳤다. “지금 지나가시는 여러분의 회사, 그리고 지금 지나가시는 여러분이 몸담은 어딘가에서 또 벌어질 일입니다. 또다시 벌어지고 또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지나가고 그렇게 끝내서야 되겠습니까?”

고졸 청년의 ‘가짜 노동자’ 경험사 3.
책 속의 유령 – 대필작가


-캐디로 일하면서는 자주 무임금 노동을 했고, 그다음에 물류회사에서 위장도급으로 일하면서 정규직과 차이없이 일하는데 정규직 대우를 못 받는 노동을 한 건데요. 그다음에는 어떤 일을 했어요?

대필을 했죠. 대신 책을 써주는 일이요. ‘고스트 라이터(ghostwriter)’. 출판기획사에서도 했고 프리랜서로도 했었고요. 대필 일은 전체 기간으로 치면 2년에서 3년 정도 한 것 같아요. 건 마다 기간이 다르겠죠. 이후에도 일이 있으면 아르바이트로 조금씩 했었고요.

-대필로 직업을 전환한 계기가 있나요? 사실 출판사에서는 대학을 졸업한 잠재적인 인력들을 많이 확보하고 있을 텐데 슷캇 씨가 가진 경력은 고졸이고 육체노동 쪽의 여러 가지를 한 것밖에 없는데 어떤 계기로 ‘먹물’의 일로 볼 수 있는 직업으로 전환하게 된 거예요?

계기라고 할 건 없어요. 일단 어쨌든 일자리는 필요한 거였고요. 그때 물류회사는 자의와 관계없이 그만두게 됐고, 그러면서 할 수 있는 일을 찾다가 시작하게 된 거였죠. 처음부터 이쪽으로 취직한 건 아니었어요. 그냥 하나, 둘씩 일을 받아서 하다 보니까 (더 맡게 됐죠). 어쨌든 결과물이 나왔으니까요.

-출판사에서 안 맡기려고 하지 않아요? 글에 대해서 검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자료가 아무것도 없잖아요.

출판사라기보다는 주로 개인 (의뢰)로 했었고요. 제가 보여주는 건 글이죠. 일단 제가 쓴 글을 평가물로 보여줘요. 아니면 이런 식으로 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기획안을 만들어가서 보여주는 거죠.

-어떤 책을 썼어요?

아시겠지만 제목을 밝힐 수는 없어요. 소설도 있고 동화도 있었죠. 소설 같은 경우엔 이런 식이에요. “자신이 대단한 아이디어가 있는데 문장 같은 것은 잘 못 쓰겠으니 이러이러하게 해 달라”고 의뢰하는 거죠. 더 재미있는 건 그런 것들이 하청의 하청으로 넘어오는 경우가 있어요.

-대필 작가에게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못 쓰겠으니 다시 하청을 주는 거예요?

네. 이름 있는 교수에게 부탁했는데 그 사람이 못 쓰겠으니까 넘긴다거나 그런 식이죠. 그 교수가 중간에 (돈을) 떼어먹기도 하고…

-공공연하게 일을 구할 수는 없을 텐데 어떤 암흑의 루트를 통해서 거래가 성사되나요?

그건 일을 하다 보면 알게 되는 거예요. 일종의 암시장 같은 게 있는 거죠. 그런데 사실 그런 식으로 뭘 갖고 와서 그 일이 저에게까지 오면 이건 도저히 쓸 수 없는 상태인 경우가 많아요. 그러면 얘기하고 새로운 것을 제시하고 그러다 보면 결국 처음부터 새로 쓰는 게 되는 거죠. 그런데 사람 심리라는 게 웃기는 게 의뢰인은 자기가 다 썼다고 생각하는 거죠.

-소설이나 동화는 대표적인 창작물인데 정말 우스운 일이네요. 대필한 책이 몇 권 정도 돼요?

소설이랑 동화를 통째로 쓴 건 하나씩밖에 안 되고요. 자세히 말하기는 어렵고 여하튼 나머지는 대부분 기업 사사(社史) 같은 것을 대필하는 거였어요. 사실 흔히 하는 것은 자기소개서 대필인데요. 저는 그건 (제거로는)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그건 저부터도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르겠거든요. (웃음) 자소서가 사실 제일 어려운 일이었어요.

-글을 ‘업’으로 삼을 정도로 잘 쓰는데 대학은 왜 안 갔을까요?

공부를 못 해서요.

-하긴 꼭 대학을 가야 하는 건 아니니까요. 어릴 때부터 책 읽는 거 좋아하고 국어도 잘했다고 했으니 그런 소질을 살려서 대필을 하게 된 거군요.

(웃음)

-그런데 대필작가는 왜 그만뒀어요?

그만뒀다기보다 일이 끊긴 거죠. 어느 순간 일거리가 뚝 떨어졌어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비우량주택담보대출) 사태 때 경제가 안 좋아지면서 2008년쯤에 완전히 백수가 됐어요. 그때 당에서 일하지 않겠느냐고 제안이 들어왔는데…

드디어 진짜 노동!
그런데… “일하는 중인데 직장이 없어졌어요!”




-갖은 ‘유령 노동’ 경험을 거쳐 2009년 경제 위기 때 당직자 자리에 안착하게 되는 거군요. 노동한 결과물로부터 소외되는 경험이 대필작가 일로 끝이 나는 건가요?

사실 그 이후로도 이런저런 일을 했었지만 어쨌든 2009년에 당직자가 됐어요. 그전부터 사회당 당원이기는 했죠. 당직자가 되기 전부터 당하고 같이 몇 가지 일을 했던 적이 있고요. 그러면서 당직자로 일 해보지 않겠느냐고 당에서 전부터 제안했던 건데 계속 안 한다고 했어요. 당직자면 정규직 일자리인데 왜 안 한다고 했느냐고요? 그건 인생을 망치는 길이라고들(말해요). (웃음) 사실 제가 각오도 없었고, 아까 얘기했다시피 먹고 사느라 바빴어요.

-육체노동 경험과 고졸 학력을 가진 서른 살 슷캇에게 당에서는 왜 당직자 제안을 했을까요?

그 때 당하고 같이 일을 조금 했었어요. 글을 쓰기도 했었고 가끔 어떤 기획을 할 때 같이 참여하기도 했었고요. 그런데 그런 것보다는 아마 성격이 마음에 들었을 거예요. 그때 당 대표가 엇나가고 돌출되고 조금 이상한 그런 사람들을 좋아하는 사람이었어요. (웃음)

-당직자가 되기 전에 그냥 당원이었을 때에는 어떤 일을 했어요?

교육자료 만드는 일을 했어요. 그렇다고 당 강령이라든지 정책 같은 것들을 공부해서 썼다기보다 원래 관심 있었던 교육 분야에 대해서만 교육자료를 쓴 거고, 그걸 쓰려고 뭘 (준비)하거나 그러지는 않았어요. 그런 식으로 몇 가지 일을 했지만, 당직자가 될 생각이 처음부터 있었던 건 아니에요. 한데 3개월 동안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그때 다시 당에서 (당직자) 제안이 들어왔고 그래서 저는 “감사합니다.” 이러면서 들어간 거죠. 지금은 잘 모르겠네요. 그때 덥석 문 게 잘한 것인지는. (웃음)

-당직자가 되고 나서 ‘덕후위원회’를 만들었죠? 국내 최초로 ‘오타쿠’의 정치세력화를 꾀한 사례로 여러 차례 보도되었죠.

그냥 그런 걸 만들면 재미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런 (덕후 같은) 것을 사람들이 싫어하니까 더 하고 싶어서 한 거죠. 일단 당내에서 뭔가 부문 위원회를 만들고 싶었고, 스스로 정체성에 관해서 얘기하다 보니까 그렇게 됐고요. (덕후로서) 주체적인 (정치) 활동이 필요했어요. 그래서 당내에 원래 있던 사람들로 만들었고 동조자들이 합세해서 부문위원회를 만들 수 있게 됐어요. 30명을 모으면 부문위원회를 만들 수 있다는 규정이 있거든요.


덕후위원회 깃발

-덕후위원회 위원장이었다고 하면 대단한 덕후인 것처럼 느껴져요.

그냥 평범하게 만화 좋아하고 애니메이션 좋아하고 게임도 좋아하고… 그런데 덕후위원회 위원장이라는 게 저에게는 족쇄가 된 측면이 있었던 것 같아요. 뭘 해도 사람들이 그것만 기억하니까. 그리고 이런저런 오해도 있었고요. “네가 뭔데 오타쿠를 대표하느냐”는 식의 비판이 있었죠. 당이라는 것에 대해 잘 이해하지 못하시는 분들이 그렇게 오해하는 건 어쩔 수 없어요.

-슷캇이 속해있는 사회당과 덕후위원회는 어떤 공통의 가치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나요?

‘누가 됐든 정치 활동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발상이 중요한 것 같아요. ‘누가 됐든’이라는 언명이. 덕후는 주체가 될 수 없어서 그렇다기보다 ‘누가 되었든’이라고 이야기하는 관점에서 어떤 상징적인 인물이 덕후인 거죠.

-정규 노동시장에서 배제된 노동을 경험하다가 처음으로 정규직에 취직한 건데요. 그 첫 직장인 사회당은 어떤 곳인가요?

98년에 만들어진 공식적으로 사회주의를 지향하는 정당이죠. 지금 있는 진보정당들과는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지만 일단 당원들의 관계가 굉장히 단단한 조직이에요. 서로에게 헌신적인 관계죠.

-사회당 강령에는 광범위한 국유화라든가 사회주의를 추구하는 정당이 추구하리라고 예상되는 그런 것들이 들어가 있나요?

국유화나 그런 내용이 사실 명확하게 쓰여 있지는 않고요. 애매하게 쓰여 있죠. 그러니까 국유화 자체보다는… 오히려 지금 흔히 말하는 제조산업이나 생산산업에서의 착취 문제보다는 금융수탈문제에 더 중점을 두고 있어요.

-그런 시각이라면 금융자본을 국유화하는 것도 해법이 될 수 있겠네요.

결과적으로 봤을 때는 그런 거죠. 이제 금융투기 자체를 없애기 위해서 세금을 물린다거나 그런 것들부터 (이야기하는 거죠). 금융거래세나 토빈세 도입 같은 것들이 모두 당 정책에 들어 있기는 해요.

-그러면 과거 민노당 초기 정책과 크게 다르지 않잖아요?

세금을 걷는다는 부분만 보면 다 똑같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따지자면 민노당에서 구체적으로 토빈세를 얘기한 적은 없죠. 민노당에서 조세 강화를 얘기했다면 사회당에서는 투기불로소득을 환수하기 위해 모든 종류의 거래에 세금을 부과한다는 거죠. 여기에는 토지보유세도 포함되는데 그게 자산가치를 하락시키자는 거거든요. 그리고 소득세와는 다르게 거래세라는 것은 주식 등의 (투기적) 거래 자체를 줄이는 효과를 거두겠지요. 그걸 통해서 국유화로 나가는 거고요. 토지세 같은 경우는 토지국유화와 관련지어 생각할 수 있는 문제겠지요.

-그러니까 산업이나 금융, 토지 등에 대한 국유화를 전면적으로 내거는 거예요?

그렇죠. 지향점이죠. 다만 좋게 말하죠. 상냥하게, 조심스럽게 얘기하죠. (웃음) 어쨌든 일단 기본적으로 사회주의적 지향 혹은 그런 영향을 받은 정치 세력이라면 다 그렇겠죠.

-그런 사회주의적 지향에 대해 시대착오적이라고 한다거나 이미 실패하지 않았냐고 하는 식의 반론이 예상되는데 어떻게 생각하세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이미 실패했다고 말하는 것은 소위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비판인 건데요. 그런데 우리가 그것과 100% 똑같은 길을 얘기하고 있지는 않거든요. 그리고 그게 사실 그 당시에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실제로 사회주의 국가였는지 따져 봐야 하는 거잖아요. 그런 생각들이 있어야 하는 건데, 그런 (단순한) 반론이 들어왔을 때에는 이미 장황한 설명은 싫다는 것이기 때문에 딱히 그렇게 답변하려고 한다거나 그렇지는 않죠.

-결국, 사회당은 보다 광범위한 국유화와 시장기능의 규율 강화라는 두 축을 중요한 지향으로 삼았다고 보면 되겠네요?

그렇죠. 그런데 이제 그런 게 (사회당만의 지향이라고 얘기하든 안 하든)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아요. 최근에는 보수정당들도 그렇게 얘기하잖아요. 조세를 강화하고 필수산업에 대해서는 국유화하고 시장을 규제하고, 그런 것들을 보수정당들도 얘기하는 거라서 그런 것에 대해서 (비현실적인 사회주의 지향이라고 이전처럼) 문제 삼는 일은 없을 것 같아요. 오히려 북한이 어쩌고 그런 얘기를 가지고 비판을 받은 것들이 많았죠.

-정당의 지향에 감화를 받아 활동하고, 처음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경험케 한 사회당이 이제는 사라지게 됐는데요. 우리 진보정당 역사를 감안하면 사회당은 어떤 의의가 있어요?

굳이 따지자면 창당 때를 생각했을 때 사회당이 청년세대의 정치결사라는 의미가 (있다고 보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사회당’이라는 이름의 정당을 10년 동안 한국에서 유지했다는 것이 있겠죠. 개인적으로는 처음으로 정규직 일자리를 갖게 된 곳이기도 하고요. 어쨌든 부당하게 잘린 일은 없는 곳이었으니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죠.

-제대로 된 첫 직장이 이제 사실상 흡수합병 되는 건데요. 사회당의 진로와 슷캇 씨와는 이제 상관없는 건가요?

지금의 저는 상관없죠. 아무래도 그동안 어느 정도 (사회) 운동을 해오면서 저희가 운동할 수 있는 기반이 있으니까요. 당의 진로와 상관없이 그런 기반이 쌓이고 나면 대신에 책임이 생기죠. 저를 통해서 사회당에 입당한 사람들이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책임감이 생기는 거죠. 그리고 어쨌든 사회당이 없어져도 사회당 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10년이 넘게 있는 거니까 그 사람들이 완전히 사회당을 버리고 갈 수는 없는 거거든요. 그들과 같이했던 어떤 약속들이 지금까지도 있는 거고요.


사회당 덕후위원장 당시 김슷캇

-배제의 경험을 참 한결같이 해왔네요. 무직, 알바, 캐디, 물류창고 하도급, 대필, 그리고 ‘배제된 사람들’을 대변하는 정당에 취직하게 됐지만, 그 정당 자체도 없어지게 됐고요.

그것들 자체가 배제의 경험이었다기보다는 계속 그런 상황에 놓일 수밖에 없던 게 배제겠죠. 정당에 오기 전에 한 번도 정규직이라는 것을 경험해보지를 못한 건데 그 상태 자체가 배제였던 거죠. 정규 노동시장으로부터의 배제.

-그동안 불안한 상태에서 노동을 해오면서 부당한 대우를 당한다고 느낀 적이 많았을 텐데요. 그러면서 자신이 공부를 안 했던 것, 대학에 가지 않은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았나요?

글쎄요. 그런 후회는 딱히 없었던 것 같아요. 지금 고등학교 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공부하는 게 원래 성격과 안 맞았던 거라서요. 지금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열심히 공부할지는 모르겠어요. 물론 이제는 위기감이 있겠죠. 그때는 위기감도 없었으니까.

-지금은 부모님과 같이 살아요?

네. 원래 나가서 살다가 끌려들어 갔어요. 집에서 끌고 가면서 말했던 논리는 어차피 밖에서 집세를 낼 거면 집안 형편도 안 좋은데 집에다가 내라는 거였죠. 저는 거기에 저항할만한 용기는 없었던 거고. (웃음)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어요?

글쎄요. 그게 참 모호한데. 굳이 따지자면 제일 좋은 게 뭐냐면, 이상향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이런 거예요. 인터넷 잘 되는 만화방에서 짜장면 먹으면서 그냥 그렇게 사는 게 제일 좋거든요. 그냥 그런 정도의 행복?

-그게 지금은 안 되나요?

돈이 없으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 그렇게 되는 것도 중요하고 누구나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는 것도 중요하죠.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지금 운동하고 있는 거고요.

-인터넷 잘 되는 만화방에서 짜장면 먹으면서 살 수만 있으면 더는 특별한 목표나 이상은 없는 거예요?

그게 유지된다면 오히려 별 욕심이 없어질 것 같은데요. 만화방이든 게임이든 기본적으로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겠다는 것이라서 사실 그렇게 기본적으로 원하는 생활이 충족되면 그다음에 하고 싶은 뭔가가 또 생길지는 알 수 없죠. 그런 식으로 생활이 해결되는 상태에서도 여전히 (정치) 운동을 하는 게 즐겁다면 계속하겠죠. 그리고 그때는 지금보다는 더 낫겠죠. 왜냐면 지금보다는 더 자유로운 상태에서 하는 거니까요.

인터뷰를 마친 김슷캇은 유유히 당 대회장으로 돌아갔다. 사회당원 85%의 찬성으로 진보신당과 사회당의 통합이 결정됐다. 김슷캇도 진보신당 서울시당 당직자로 자리를 옮겼다. 인터뷰를 마친지 한 달이 지났다. 19대 총선에서 진보신당은 정당투표 2%를 넘기지 못하고 등록이 취소됐다. 아마 김슷캇은 진보신당 서울시당 당사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만화책을 읽고 있었을 것이다. 김슷캇은 서비스로 온 군만두를 입에 물고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얼어죽으니까 청춘이다"


중덕쨔응 같이 짜장면 먹으러 갈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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