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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저주9] 코렁탕 먹더니…“우리 정근이가 달라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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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저주9] 코렁탕 먹더니…“우리 정근이가 달라졌어요”
입력 : 2012-04-30 16:14:58ㅣ수정 : 2012-04-30 16:14:59

‘국보법이 만든 젊은 투사’ 박정근(24세. 오타가 아니다.)을 만났다. 잉여로운 20대 청춘을 보내고 있던 그에게 국가가 나서서 40일의 ‘의식화’ 무상 급식을 제공한 이후 정근은 투사로 거듭났다. 트위터의 공이 컸다. 각종 ‘개드립’으로 트위터 팔로워가 늘어가던 어느 날, 정근에게 드립 소재로 북한이 떠올랐던 것이 시발점이었다. 북한의 대남선전용 트위터에 이런저런 코멘트를 붙여 리트윗한 것이 문제가 됐다. 한 공안검사가 국가보안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정근을 기소하기에 이른다.

정근은 트위터에서 ‘평양냉면’을 찬양하거나, 평양에서 출시됐다는 신차를 자신에게 선물해 달라고 하는가 하면, 김정은의 세습을 비꼬는 의미로 아버지에게 사진관을 물려받은 자신을 ‘청년대장’이라고 불렀다. ‘김정일 카섹스’라는 불명의 한마디를 남기는 등 장난삼아 올린 ‘드립성’ 트위터 발언들이 국가보안법중 ‘찬양•고무죄’와 ‘이적표현물작성 및 반포’ 죄목에 해당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했다. 정근에게 국보법을 적용한 검찰의 행태가 코미디인 게 그는 북한에 매우 부정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한 진보 정당의 열성 당원인데, 그 당의 공식 입장은 북한 정권에 매우 비판적이다. 대한민국 검찰은 북한을 조롱했다는 이유로 정근을 기소한 셈이다.

정근은 2012년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상과 달리 수원 교도소에 갇혔다. 자택과 함께 압수수색을 당했던 사진관은 어쩔 수 없이 문을 닫았다. 어깨 넓은 형님들과 수감 생활을 하던 그는 국보법과 표현의 자유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한다. 중국 문호 루쉰의 책을 읽는가 하면, 국가 권력에 비판적이었던 중국 근대 지식인들을 접했고 신영복 교수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같은 책을 읽었다. B급 영화, 인디 음악, 사진 찍고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발랄한 청년이 ‘의식화’를 체험한 시간이었다.

다행히 2월 말에 보석 허가를 받아 정근은 감옥에서 나왔다. 정근을 만났을 때는 석방된 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이었지만 그는 이전처럼 활발하게 트위터 하기를 두려워하는 모습이었다. 늘 넉살 좋은 웃음으로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던 장난꾸러기 청년이 사뭇 진지해져 있었다. 2차 공판을 앞둔 정근을 만나 국보법이 그를 ‘투사’로 만들어주기 전 ‘개드립 치고’ 놀기 좋아하던 사진가 박정근의 리즈시절(스포츠에서 선수가 날아다니던 시절, 즉 전성기를 뜻한다.)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장군님, 빼빼로 주세요”
빼빼로데이를 앞둔 솔로 청년의 불온한 농담


-굳이 ‘북한’을 가지고 농담을 했던 이유가 있었나요?
별로 심각하게 생각했던 건 아니고요. 그냥 하위문화로 생각했던 것 같아요. 인터넷 일각에서 북한 말투를 따라 하면서 같이 낄낄거리고 그런 게 유행처럼 번지던 것을 하위문화로 본다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러니까 ‘북한’도 하위 문화의 한 장르로 소비되는 거죠. 저뿐만 아니라 요즘 네티즌 중에 많은 사람이 북한이나 북한에서 만드는 표현물들을 그런 (마이너 문화 같은) 것으로 소비하는 것 같고요. 저 역시 그런 편이고 그런 사람 중에 제가 걸려서 이런 재판을 받게 되는 거로 생각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기존의 국가보안법 사건들과는 다른 맥락이 있는 거죠.

-하위 문화에 관심이 원래 많았나요?
그랬던 것 같아요. 검찰 조사 때에도 “박정근 씨는 마이너 문화나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것 같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더라고요. (제가) “물론 그렇다”고 하니까 (검찰이) “북한도 그런 맥락으로 관심이 있는 것이냐”고 물어봐서 “그런 면도 있다. 왜냐면 북한은 폐쇄적인 국가니까”라고 얘기했어요.

<검찰이 국보법 위반 사유로 제시한 정근의 트위터 발언과 북한 조롱의 의미가 담겨있다고 반박한 정근 쪽이 제시한 트위터 발언. 어느 것이 찬양•고무이고 어느 쪽이 비판•조롱인지 알아맞춰 봐요.>
        “나의 사랑, 너의 사랑, 아주 귀여워요, 요덕수용소의 무료숙박권을 드릴게요”
        “올해의 장군 김정일, 내년의 장군 김정일”
        “김정일가슴만지고싶다”
        “장군님을생각하며주체주체하고웁니다. 갓난아기들은옹위옹위하고웁니다”
        “카섹스는 김정일을 말하는 것이다”
        “김일성개새끼해보라우”
        “김정일을퇴치하자, 병균퇴치, 암퇴치.”
        “김정일카섹스모에모에”
        “김정은은김정일의섹스로생긴자식이아니라그냥나온유산균같은존재입니다”
        “김정일국방위원장사망에조의를표하며조문대신에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우라늄과플루토늄을조의의뜻으로보내겠습니다.”

-원래 북한에 관심이 많았나요?
그냥 북한에서 나오는 말투나 (표현물이나) 그런 것들이 웃기다고 생각하다가 이제 국가보안법으로 이렇게 되다 보니까 (북한 문제에 대해서) 생각하게 됐죠. 국보법 관련 사건이 예전에는 어떤 게 있었는지 그런 것을 알아보았어요. 국보법이 어떻고 통일운동이 어떻고 그런 걸 생각하게 된 거죠. 참 아이러니한 것 같아요. 국가가 그런 것에 관심을 두게 만든 거니까요. 역설적인 게, 뭐가 이적표현물이고 뭐가 아닌지 이런 것들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 건 입건 이후부터였어요.

-그러다가 국가의 은덕으로 수원구치소에서 무상급식을 40일 받으시고 북한 문제에 대해 더 많이 공부하게 되신 거군요.
(웃음)

그저 사진 찍는 게 좋았던 청년대장박장군의 ‘2대 세습’ 이야기

-그전에는 원래 어떤 일을 했었나요?
2011년부터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어요. 그전까지는 다른 스튜디오나 유사 업종 회사에서 일했어요. 광고 사진, 아기 사진, 결혼사진 등 여러 분야를 다녔죠. 그러다가 원래 사진관을 하시던 아버지께 “이제 가게 일을 도우라”고 그러셔서 사진관을 물려받게 됐고요.

-사진관 2대 세습이네요. (웃음) 남자 88년생이시면 보통 대학에 다닐 나이인데 바로 생업에 종사하고 계신 거네요.
대학은 다니다가 중퇴했어요. 대학생활이 저와 그렇게 어울리는 게 아닌 것 같아서요. 저는 고등학교 때부터 벌써 (저보다) 나이도 많고 재미있는 일을 같이할 수 있는 친구들을 많이 사귀어오다 보니 대학생활이나 (그 안에서의) 인간관계 같은 것에 흥미를 많이 못 느꼈죠.

-대학 다닐 때에는 사진 관련 분야를 전공했나요?
아뇨. 전문대 사회복지과에 갔었어요. 당시에 제가 몸이 아픈데, 집에서 그냥 일단 대학에 가라고 해서 간 거였어요. 다리가 안 좋아져서 저는 가든 말든 별 생각 없었는데 집에서 그래도 가라고 하니까 간 건데 학교생활에 흥미를 못 느꼈죠. 대학 가서 친구들끼리 얘기하고 같이 과제하고 그런 활동들을 하는데 사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하위 문화나 그런 쪽에 관심이 많은 경우는 잘 없잖아요.

-하위 문화에 대한 관심사를 공유할 수 있는 친구도 드물고 학교에서 배우는 것 자체에도 흥미를 별로 못 느껴서 그만둔 거네요.
네. 1년 다니다가 그냥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그만뒀죠. 그 당시 이미 사진 관련 일을 하게 됐고요. 딱 대학에 들어갔을 때부터 사진에 관심을 두게 됐었거든요. 집안에서 원래 하는 일이 사진이다 보니 환경상 그런 일에 자주 접하면서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관심 두고 사진 찍으러 다니고 그러다 보니 그 분야에서 일자리를 구하기가 상대적으로 쉬웠고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대학을 다닌 것에 비해 그 기간에 훨씬 한 일이 많다고 느껴져서 대학을 그만둔 것을 후회하거나 그런 적은 없었어요.


<누구든 작은 사진가 박장군한테 걸리면… 아주 끝내주게 나오는 거야>

-사진을 찍으러 다니면서 스스로 배운 건가요, 아니면 아버지께?
일단 혼자 사진 일을 하고 다녔어요. 처음에 사진 일을 한다고 하니 집에서는 반대하셨거든요. 힘들다고 하시면서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거 말을 잘 안 듣는 편이라서 직접 일자리를 구해서 다니고 그랬죠. 그러다가 이제 아버지가 가끔 도와주시기도 하시고 그랬고요. 그런 식으로 사진 찍으면서 생업을 유지한 거죠.

국보법 수사망이 조여오기 전
박 장군의 리즈 시절


-정근 지인에게 듣기로 국보법 수사 이후로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됐다고요. 지금도 국보법 관련 얘기가 나오면 상당히 조심스러워는 모습이신데요. 원래는 활발한 성격에 인디 음악 하는 친구들의 앨범 사진을 찍어주는 등 언더그라운드 문화계의 마당발이었다고 들었어요.
마당발이었다기보다 고등학교 다니면서 인터넷을 통해 사람들을 만나고 음반을 만들고 그런 일 하는 걸 좋아했어요. 클럽에서 공연하는 친구들보다는 방구석에서 음악하는 친구들을 사귀게 됐고 그러다 보니 음악 하고 싶어하는 친구들을 서로 연결 해준다거나 음악 하는 친구들 음원을 모아서 가내수공업으로 음반을 만들어서 팔기도 하고, 그런 걸 하려고 나중에 음반 레이블을 만들기도 하고 그랬죠. ‘비싼트로피’ 라는 레이블이요.

-고등학교 때 음반 레이블을 만들었다고요?
네. 밤섬해적단 권용만(3장?)도 그 때 비싼트로피 레이블에서 같이 활동했어요. 방구석에서 개인적으로 음악 하고 있다가 만나서 의기투합한 거죠. 당시 한 클럽에서 완전히 생소한 뮤지션이나 실험음악 같은 것들을 소개해 주는 공연이 있었어요. 불가사리라는 이름의 공연인데 지금도 있어요. 거기에 그 친구를 데려가서 그런 공연도 시키고, 그 무렵 그냥 mp3 형태로만 음원을 무료로 제공했었는데 그걸 음반으로 만들어서 팔았죠.

-인디 밴드의 매니저 역할을 고등학교 때 한 거네요?
네. 그렇게 친구들을 모아서 음반을 내서 팔고 그러던 게 어느 정도 알려지다 보니 다른 밴드들과도 일하게 됐죠. 당시에 포르투갈에서 언더그라운드 음악 하던 사람들과 연락이 돼서 같이 앨범을 내기도 했어요. 고등학교 2, 3학년 때까지 그런 식으로 활동했죠.

-뮤지션들이야 20대가 많았겠지만, 정근은 고2, 3학년 때였는데 그렇게 외부 활동을 많이 할 수 있는 상황이었나요? 보통 야간자율학습도 있고 바쁠 때잖아요.
물론 제가 고등학교 때에도 강제 야간자율학습이 있기는 했어요. 그런데 저는 이런저런 활동을 하니까 4시간 하던 야간자율학습을 2시간으로 줄여달라고 그랬죠. 나쁜 선생님을 만난 게 아니라서 몇 번 얘기하니까 줄여주시더라고요. 그래서 남은 2시간을 활용해 레이블 활동을 하고 그랬어요. 큰 비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만화 커뮤니티나 그런 모임에서 만나서 사람들과 얘기하다 보니까 취미가 비슷하고 되게 재미있었어요.

-그 때 만들었던 레이블을 통해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또 누가 있어요?
같은 사이트 게시판에 놀고 그러다가 제 레이블에서 활동하고 지금도 음악하고 있는 친구로 김간지라는 사람이 있어요. 지금은 술탄오브더디스코 라는 밴드에서 활동하는데 그 그룹 리더와 같이 허경영 씨가 불렀던 노래 ‘롸잇나우’를 작사했던 친구예요. (웃음) 미디로 메탈 음악을 했던 ‘Machine高3’이라는 밴드의 재수생, 제주도에 있는 3인조 하드코어 펑크 밴드School Ripper 같은 게 떠오르네요.

-고등학생 때 어떻게 제주도에있는 밴드와도 교류하는 전국구 네트워크를 구축할 수 있었어요?
그냥 제가 인터넷 게시판에서 놀고 그랬던 사람 중에 제주도에서 산다는 사람을 본 거예요. 고등학생인데 한 명은 드럼을 칠 줄 알고 한 명은 기타를 칠 줄 아는 데 보컬이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밴드가 우리나라 입시제도나 그런 거에 대해서 비판적인 노래를 하는 친구들이라서 관심을 두게 됐는데 그즈음에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 지방에서 음악을 하는데 할 줄 아는 건 노래밖에 없다고 하더라고요. 그 사람에게 이러이러한 밴드에서 음악을 같이 해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니까 좋다고 해서 밴드에 합류하게 됐어요.

-지방의 인디 밴드에도 관심 두고 연결해주고 그럴 정도면 정말 마당발이었네요.
그렇다기보다 그때 제가 지방이나 그런 (하위 문화가 상대적으로 적은 지역의) 밴드들에 대해 어느 정도 관심이 있었거든요. 대부분의 인디 음악이 서울 인근이나 홍대, 신촌 같은 특정 지역에 몰려 있잖아요. 그런 문제에 관심이 있었는데 그때 제주도에 있는 밴드를 연결해서 공연할 수 있게 만든 게 큰 의미가 있었죠. 물론 제가 그때 레이블 활동을 하다 보니 밴드를 새로 발굴해 내고 그런 작업이 저에게 필요한 일이기도 했고요.

-그런 활동을 하는 게 본인에게 의미 있는 수입으로 돌아오기도 했나요?
그런 것보다 그냥 만드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이었던 것 같아요. 음반 제작으로 그렇게 돈이 벌리지는 않아요. 하드코어 펑크, 메탈이나 인더스트리얼 같은 음악 시장이 국내에서 그렇게 소비층이 뚜렷하지가 않으니까요. 사실 수익이 나는 건 국외의 다른 뮤지션과 교류해서 들여온 그들 음반을 우리가 낸 앨범과 엮어서 웃돈을 얹어 파는 활동 같은 것들이죠. 그래도 제일 중요했던 건 우리 레이블에 같이 활동하는 밴드를 더 찾고, 같이 기획해서 앨범을 내고 그런 것들이었던 것 같아요. 그 일을 했을 때가 제일 즐거웠고 제일 친구를 많이 사귀었을 때예요.

인디밴드 야매 음반 제작자에서
현장 사진가 박장군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인디음악 레이블을 운영해오다가 한 편으로는 대학을 그만 두고 직업 사진가의 길을 택하게 되는데요. 경찰이 압수수색 할 때 영장에 적힌 혐의사실에 정근이 그동안 철거민 투쟁이나 반값등록금 집회, 홍대 청소노동자 투쟁 등에 참가한 것도 포함돼 있다고 들었어요. 상업 사진가 활동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현장을 기록하는 정치적 활동에도 관심을 뒀던 건가요?
아뇨. 그냥 처음에 갔던 곳이 홍대 앞 철거민 투쟁현장 두리반이었는데 그때는 놀러 갔어요. 친구들이 거기에서 공연하니까 저도 놀러 가서 본 거죠. 원래 저는 그렇게 정치의식에 대해 특별하게 생각할 만한 계기가 없었던 것 같아요. 사실 정치적인 지향을 굳이 얘기하자면 어느 정도 보수적인 입장에 있었다고 봐야죠. 왜냐면 그 당시 일했던 곳만 하더라도 광고 사진을 찍는 일상적이고 상업적인 현장이었으니까 정치적으로 진보 쪽으로 생각할 기회가 특별히 없었죠.

-친구들 보러 놀러 갔다가 점점 철거민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고 관련된 현장을 사진으로 남기게 됐다?
그렇게 된 거죠. 그리고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살던 집이 철거가 예정된 공간이었기 때문에 더 와 닿는 부분이 있었어요. 길음 뉴타운 쪽에 살았었거든요. 거기에서 태어나서 살다가 지금 암사동에 집을 마련해서 살기까지 중곡동에도 살고 이사를 여러 번 다녔어요.

-뉴타운 개발 지역에 살았고 이사를 여러 번 다녔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나중에 철거 지역 문제를 접했을 때 더 관심을 가지게 된 거군요.
네. 그렇게 되면서 두리반이나 명동 마리, 포이동 화재 지역 같은 곳에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재개발 구역 철거 논란 관련해서 사진전을 하고 그랬네요.

- 잠시 사진전-
<2011년 재개발과 철거, 그리고 박정근>

-강제 철거를 진행하는 재개발 현장에 다니면서 사진가로서도 이전과는 다른 활동이나 생각을 하게 된 것 같은데요. 사회 문제에 접하면서 정치적 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라고 하기도 했고요. 북한 문제에 대해서도 그런 정치적 의식을 가지게 된 계기가 있었을까요? 단순히 조롱거리이자 하위 문화로 소비되는 대상이라고 했지만 정말 그 이상의 관심은 없었나요?
철거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 것 같아요. 직접 철거 문제에 대해 생각했던 건 아니지만 어릴 때 살았던 동네에서 경험했던 것이나 그런 느낌들이 영향을 미친 것처럼 남북 문제도 커오면서 자연스럽게 접하게 되니까 구체적이든 아니든 어떤 의식이나 생각 같은 게 있을 수밖에 없는 거죠. 예를 들어 제가 딱 사춘기를 겪을 때쯤 6.15공동선언이 있었고, 고등학교에 들어와서 보니까 참여정부가 들어서서 국가보안법 폐지 운동 같은 게 있었고, 그런 것들을 보면서 계속 자라온 거잖아요.

-북한 문제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뉴스나 학교 교육을 통해서 알게 되고 그 수준에서 관심이나 의식을 가지는 정도였다?
그랬던 것 같아요. 예를 들어 노동 문제도 제가 직접 겪으면서 나름의 의식을 형성하게 된 부분이 커요. 사진 관련 작업을 할 때 그 분야 노동 환경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니거든요. 도제 방식으로 일하고 저임금에다가 업무시간이 길고 그런 게 존재하죠. 그래서 처음에는 저도 원래 이 업종이 그런가 보다 받아들이다가, 제가 어느 정도 경험을 쌓고 밑에 사람을 두게 되면서 노동 문제를 생각하게 된 거죠. 제가 사진을 찍고 누군가를 부릴 때 그 (부려지는) 사람을 알고 보면 저와 나이 차이가 한 살밖에 안 나고 벌써 애가 있는 사람인 거예요. 저는 그 사람보다 더 높은 임금을 받지만, 그 사람이 그 정도의 임금을 받고 가정을 꾸리고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노동 또는 노동과 관련된 여러 문제에 관심을 두게 되죠.

-정근이 사회당에 가입했던 것을 보면 사회주의적인 정치지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지 않나요?
글쎄요. 저는 특별히 그런 이념적 지향을 가지고 가입했던 것은 아니에요. 두리반에서 친구의 권유로 가입했죠. 물론 그러면서 강령을 읽고 ‘어 이거는 어느 정도 맞는 소리다’라고 생각해서 가입한 것도 있지만 ‘나는 사회주의자인가 보다’라는 의식을 두고 가입했던 건 아니에요.

-그러면 종북주의자였나요? (진지)
그런 건 아니죠. 당시 사회당 강령에 반(反)조선노동당 강령이 있었는데 그걸 알고서 가입했어요.

수원구치소 무상급식,
북한과 국보법 문제에 눈을 뜬 투사를 잉태하다


-인디음악계의 떠오르는 큰 손이자 친구들 만나고 사진 찍으러 다니기 좋아하는 청년이었네요. 북한을 조롱하고 장난치고 그러다가 감옥에 가리라고 생각을 했나요?
아뇨. 구속하는 것으로 수사 결과가 발표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어요. 그 전날 새벽까지도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놀았거든요.

<수원남부경찰서에 구속수감 된 박정근. 경찰서 구치소에서 며칠간 추가 조사를 받으면 곧 풀려나리라 생각했던 그는 면회간 친구들 앞에서 늘 밝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1주일의 경찰 추가 조사 후 정근은 수원구치소로 이감된다. 그리고 2012년 2월 20일에 보석금 1000만 원으로 석방 판결이 나기 전까지 수감 생활을 하게 된다.>

-수사를 받고 ‘옥중’ 생활을 하고 그러면서 삶이 얼마나 달라졌다고 느끼나요? 집안이 압수수색을 받고 나서 집에 들어가서 잠을 못 잔다든가, 그래서 친구 집에 가서 잠을 자지만 불면증을 갖게 됐다거나 그런 부분을 호소하는 글을 봤는데요. 성욕이 감퇴하는 등 눈물 없이 볼 수 없는 수사의 영향들을 공개서한으로 정리해 대통령 앞으로 썼던 것이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고요.
아직도 충격적이죠. 기존에 통일운동을 했다거나 그런 (대북 문제 관련) 활동했던 사람이 아닌 저에게 국가보안법이라는 것이 적용된 것 자체가요.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국가가 저에게 남북문제가 어떤 것이고 국가보안법이 적용되고, 그런 것들이 어떤 것인지 확인시켜 준 거죠. 국가가.

-역설적으로 좋은 국가가 어떤 것인지에 관한 생각 같은 게 생겼겠어요. 국가에 대해서 막연하게 생각한다기보다 이제 국가가 개인적인 삶에 직접 개입하는 것을 경험하면서 좋은 국가나 나쁜 국가, 또는 국가의 역할 같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거나 그런 게 있나요?
어느 정도 그런 게 있죠. 일단 제가 고등학교 때부터 했던 활동들이 인디 음악 관련한 일들인데 (그런 영역에서) 표현의 자유 문제나 그런 것들을 이제 더 생각하게 되는 거죠. 예를 들어 밤섬해적단 같은 밴드는 아직 우리나라에 적용되기 어려운 표현들을 되게 많이 쓰잖아요. ‘김정일 만세’라거나 그런 가사들을 생각해 보면요.

-그런데 거기에는 문제로 삼지 않잖아요.
문제 안 됐죠. ‘노래’를 하는 거니까요. 노래니까 봐줄 수 있다는 식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 같아요. 그러면 저와 비교했을 때, 저는 그냥 트위터에서 몇 마디 말만 했을 뿐인데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가) 적용되는 게 조금 아이러니한 게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죠. 그러니까 표현의 자유가 어느 정도 보장이 되는지, 국가에서 어느 정도 제재를 가하는 게 맞는 건지에 관한 문제들로 의문을 품게 되죠. 노래로 ‘김정일 만세’를 하는 건 괜찮고 트위터에서 장난으로 ‘김정일 만세’를 하면 잡혀간다는 그런 차이가 저에게는 의문이죠. 노래와 SNS를 달리 보고 처벌하는 게 그동안 SNS를 공격하고 혐오했던 정서의 총합이라고 저는 느꼈어요.

-요새도 SNS 열심히 해요? 트위터를 하루에 수십, 수백 건씩 올릴 정도로 열렬하게 써왔던 것으로 알고 있어요.
평소에 그렇게 했던 것만큼은 안 하죠. 수감 이후에는 아무래도 위축이 되니까요. 트위터를 2010년 11월쯤인가 시작했는데, 많이 하긴 했던 것 같아요. 그런데 (구치소에 다녀온 이후로는) 저를 팔로 했던 사람들이 아쉬워하더라고요. 평소에 글도 없고 예전처럼 개드립을 막 올리고 그런 걸 안 하니까요. 사실 위축되지 않을 수가 없어요.

-예전에는 트위터에서 ‘여자 친구 사귀고 싶다’고 한다거나 아니면 그냥 아무 의미 없는 말을 올린다거나 그랬는데 지금은 가끔 한 번씩 올리더라고요. 주로 국가보안법의 문제라거나 그런 의미 있는 말들을요.
저도 그 부분에서 답답함을 느껴요. 그런데 이걸 말하지 않으면 안 되겠고, 의미 있는 말을 안 하면 안 될 것 같고 그런 거죠. 그런 맥락에서 주변 사람들이 아쉬움을 많이 토로하고 있어요. 저번에 술자리에서 아는 형을 만났는데 저에게 그러더라고요. “맨날 농담 따먹기만 같이 하다고 요즘은 왜 그렇게 투사가 돼 있느냐”고요. 그래서 “나도 그게 싫다”고 했어요.

석방된 이후 그는 한동안 트위터를 하지 못했다. 하루에 300개씩 트위터를 올리던 정근은 3일에 한 번 올릴 정도로 바뀌었다. 그나마 트친들의 멘션에 답하는 수준에서 올리는 트위터가 대부분. 일거수일투족이 감시당하고 있다는 느낌 때문이다. ‘국정원 절대시계’ 를 갖고 싶다면서 김정일 관련 트위터를 올리던 과거 박정근의 패기를 그리워하는 트친들도 생겨났다.

현재 그는 진지한 얼굴로 국가보안법의 맹점을 지적하거나 표현의 자유를 옹호하는 투사형 인간으로 거듭났다. 정근의 석방을 축하하는 모임 자리에서도 농담하며 낄낄거리며 같이 웃기를 좋아하던 과거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그가 좋아하는 인디 뮤지션과 친구들이 떠들썩하게 자리를 메운 가운데 정근은 재판 기록을 한 뭉치 가져와 계속해서 공판 이야기에 집중했다. 재판 기록에 적한 트위터 발언들을 읽으며 친구들이 박장대소하는 분위기에서도 마냥 신 나지 못하던 박정근.

과연 정근이 다시 이전처럼 별 의미 없는 농담을 올리면서 친구들과 낄낄대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


<“이랬던 박정근이… 이렇게 바뀌었어요.” 석방 직후 떨리는 손으로 트위터를 확인하는 박정근(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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