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gin join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 독일 사회민주당 ①
 너냐  hit :  333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 독일 사회민주당 ①
- 사회주의자탄압법에서 수정주의 논쟁까지


독일 사회민주주의당은 30년간의 끊임없는 투쟁과 희생 덕분에 세계의 다른 어떤 사회주의당도 이르지 못한 지위를, 짧은 기간 내에 당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보장해줄 지위를 확보하였다. 사회주의 독일은 국제 노동자운동에서 가장 영예롭고 가장 책임 있는 최전방의 지위를 점하고 있다. - F. 엥겔스, 「독일에서의 사회주의」(1891년), 『저작 선집』 6권 367쪽.
  
나는 히슈베르크(1907년)에 있을 때 상트페테르스부르크의 볼셰비키 출판사를 위해 독일 사회민주당에 관한 책을 썼다. 그 속에서 나는 부르주아 사회가 위기에 빠지면 독일 사회민주당의 거대한 기구가 보수적 질서를 지탱하는 주요한 힘으로 밝혀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또다시 전개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나도 이 이론적 가설이 어느 정도나 사실로 증명될지 전혀 예상치 못하고 있었다.   - L. 트로츠키, 『나의 생애』 상. 322쪽.

독일 사회민주당은 세계 최초의 노동계급 대중정당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그 전형으로 여겨지고 있다. 1890년대 이후 수백만 대중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전진하는 듯 보이던 사회민주당은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 중 한 사람인 F. 엥겔스를 비롯해서 전 세계 노동자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역사 진보의 확고한 증거였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민주당이 1914년 자국 정부의 제국주의 전쟁을 지지하고 나서면서 평가는 정반대로 바뀐다. “배신자”. 이 말만큼 이들에게 잘 들어맞는 말도 없는 듯 보였다. 아울러 사회민주당으로 대표되던 서유럽의 노동자정당운동 전반에 대해서도 비판과 회의가 등장했다. 이것이 세계 사회주의운동의 양대 흐름, 사회민주주의와 레닌주의의 역사적 분기점이라는 사실은 이제 세계사의 상식이다. 하지만, 창당부터 1차 세계대전까지 40여 년의 세월 동안 사회민주당이 과연 어떠한 역사적 굴곡을 그려왔는지, 그리고 왜 이 당이 그런 길을 걸어가야 했는지에 대해서는 널리 소개된 게 많지 않다. 수정주의 논쟁에 대한 다분히 이론 중심적인 접근, 개혁 노선과 혁명 노선에 대한 도식적인 정리가 보다 깊은 관심과 고민을 가로막아왔다. 그러나, 한국의 노동계급도 자신의 대중정당을 건설하고 나선 지금, 우리는 독일사회민주당의 한계와 오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이 당의 역사를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따라서, 세계 좌파정당운동의 궤적을 살펴보는 이 기획도 독일 사회민주당으로부터 출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사회주의자 탄압 법 아래서 이뤄진 사회민주당의 성장

독일 최초의 공개적인 노동자 정치조직은 1863년 F. 라살레에 의해서 창설되었다. <독일노동자총연맹>이라는 이 조직은 선거를 통해 의회에 진출하고 국가의 힘을 빌어 노동자 생산협동조합을 도입하는 것을 주 노선으로 하였다. 그 무렵 독일의 정치판을 가르던 양대 세력은 보수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독일 통일의 아버지 비스마르크를 중심으로 한 보수주의자들은 대토지 소유 계급의 이해를 대변하고 프로이센의 군주정을 유지하려 했다. 반면, 신흥 부르주아지들에 바탕을 둔 자유주의자들은 좀 더 민주적인 입헌군주정을 추구했다. 노동자들이 자본가들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국가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했던 라살레와 그의 추종자들은 당시 국가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보수주의자들과 타협하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에 반대하는 또 다른 사회주의자들은 1869년 <사회민주노동당>을 건설했다(아이제나흐에서 창당했기 때문에 ‘아이제나흐파’라고도 불렸다). K. 맑스, 엥겔스의 직접적 영향 아래 있던 W. 리프크네히트, A. 베벨 등이 이 당의 중심 인물들이었다. 이들은 사회주의 사회를 열기 위해서는 기존의 국가권력과 대결하고 노동자계급이 권력을 장악해야 한다는 맑스, 엥겔스의 정치노선에 충실했다. 그리고 독일 사회의 당면 과제는 부르주아민주주의 과제를 이루는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에 자유주의자들과 연대할 망정 보수주의자들과는 정면 대결하는 자세를 취했다. 1875년에 두 조직은 고타에서 합당대회를 열어 <독일사회주의노동당(독일어 약칭 SAP)>으로 통합한다. 하지만, 맑스가 고타 대회에서 통과된 당 강령을 신랄하게 비판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두 당의 통합은 사실상 라살레파와 아이제나흐파 사이의 심각한 입장 차이를 ‘봉합’하는 데 그쳤다. 아무도 이 당이 과연 오래 갈 수 있을지 낙관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SAP를 요절의 운명에서 구한 것은 뜻밖에도 정권의 탄압이었다. 1873년부터 유럽은 자본주의 역사상 최초의 전 세계적 대불황을 경험하고 있었다. 유럽 각국의 자본가들은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모색에 나선다. 독점대자본의 주도로 중화학공업 분야에 투자하기 시작했고, 생산품 시장을 확보하기 위한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제국주의’ 시대의 시작이었다. 1871년에 통일을 달성한 독일에서는 비스마르크의 보수주의 정권이 앞장서서 독일 자본주의를 발전시키고 고도화하려 했다. 이런 비스마르크 정권에게 최대의 방해 세력은 노동계급 정치세력, 즉 SAP였다. 창당 3년차를 맞은 SAP는 개신교 지역, 공업 지역에서 노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성장일로에 있었다. 베를린, 함부르크 같은 대도시에서는 40%의 득표율을 기록하기도 했다. 비스마르크 정권은 SAP를 억압할 묘책을 궁리했다. 이 때 마침 한 무정부주의자가 독일 황제를 저격하는 사건이 벌어진다(1878. 5. 11). 정부는 즉각 <사회주의자탄압법(이하 탄압법)>이라는 새로운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SAP의 모든 “조직, 집회, 출판물”을 금지한다는 게 법안의 골자였다. 이 법안은 그 지나친 반민주적 성격 때문에 처음에는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다. 하지만, 한 달 뒤 다시 황제 암살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정부는 의회 해산이라는 강수를 두었다. 결국 그 해 10월 새 의회에서 이 법은 SAP와 가톨릭중앙당만 반대하는 가운데 통과되고 만다.

탄압법이 통과되자 SAP 의원들은 “우리는 이 법률 전체를 무시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했다. 불법화된 당 조직과 당 언론은 곧바로 지하활동에 돌입했다. 1880년 스위스의 비덴에서 열린 당대회에서는 “당은 … 모든 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 사회주의 사회를 위해 노력한다”는 고타 강령의 문구에서 “합법적인”이라는 말을 삭제하여 비합법투쟁을 내외에 천명했다. 지구당 조직 대신에 문화클럽, 여가클럽을 만들어 위장활동을 벌였고, 술집을 개점하여 회합 장소로 삼았다. 이 때문에 지역의 주요 활동가들이 술집 주인이 되는 뜻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 각지에 산개한 조직들을 전국조직으로 통합하는 역할은 당신문인 <사회민주주의자(조치알데모크라트)>가 맡았다. <사회민주주의자>는 스위스에 망명한 당원들에 의해 편집돼 국내로 밀반입되었고, 이 신문의 유통·배포가 SAP 하부 조직들의 최대의 임무가 되었다. 레닌의 <이스크라>는 바로 <사회민주주의자>를 자신의 모델로 삼은 것이었다. 그런데, 탄압법이 SAP 자체를 불법화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법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를 내건” SAP의 “조직, 집회, 출판물”만을 금지하고 있었다. 즉, SAP의 ‘원내’ 활동은 허용했던 것이다. 선거운동 조직조차 금지되었지만 어쨌든 선거에서 당선되기만 하면 그 다음부터는 합법적 활동이 가능했다. 이 점이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후 발전에 미묘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비덴 대회의 결정에서 잘 드러나는 것처럼, 정권의 탄압에 직면한 SAP로서는 국가와 정면 대결하는 노선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와의 협력을 추구하는 라살레주의를 폐기하는 데는 더 이상 논쟁의 필요조차 없었다. 더구나 국외로 망명한 주요 활동가들은 외국에서 맑스, 엥겔스의 영향을 깊이 받았고, 그 영향력은 <사회민주주의자>를 통해 국내에까지 미치기 시작했다. 즉, 이념의 차원에서 SAP는 급진화 하였다. 하지만, 실천의 차원에서는 이와는 다른 결과가 나타났다. 탄압법 아래서 정치활동의 마당이 원내로 축소되었기 때문에 선거에 의원으로 당선되는 것이 점점 더 중요시됐다. 이와 함께, 의원단이 실질적인 당 지도부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즉, 실천의 차원에서 SAP는 독일의 제도 정치에 점차 종속되는 양상을 보였다. 당의 이념과 실천이 서로 엇나가기 시작한 것이다.
      
사회민주당의 첫 번째 시험 - 증기선보조금 논쟁
  
이러한 모순이 처음으로 폭발한 것이 1884년 증기선 보조금 논쟁이었다. 비스마르크 정권은 동아시아(조선을 포함)와 태평양을 운항하는 증기선 사업에 보조금을 지급하는 법안을 내놓았다. 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독일 생산품 시장을 확보하려는 제국주의 정책의 일환이었다. 당시 SAP는 탄압법 실시 직후의 침체(81년 총선에서 득표율 25% 감소)를 딛고 다시 착실한 성장을 계속하고 있었다. 천 명 가량의 활동가들이 해외로 망명하거나 추방되는 와중에도 84년 총선에서 12석의 의석을 두 배인 24석으로 늘릴 수 있었다. 이 때 당선된 의원들에게 닥친 가장 곤혹스러운 문제가 바로 증기선 보조금 법안에 찬성할지 반대할지 하는 문제였다.  맑스, 엥겔스의 반식민주의 입장을 따른다면 이 법안을 무작정 통과시켜줄 수는 없는 것이었다. 굳이 식민주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SAP는 정부의 모든 정책, 심지어는 사회보험제도의 도입에 대해서도 그 불철저성을 이유로 “완전 반대” 입장을 견지해왔었다. 그런데, 의원단 내에서 증기선 보조금 법안에 대한 반대 입장은 베벨 등의 소수 의원에 그쳤다. I. 아우어를 중심으로 하는 다수 의원은 법안에 호의적이었다. 식민정책을 둘러싼 암묵적인 입장차이도 무시할 수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지지 이유는 이 법안이 조선산업 경기를 활성화시켜줄 수 있다는 점이었다. 많은 SAP 의원들은 조선산업의 근거지인 함부르크 등의 항구도시 출신이었던 것이다. 이들은 자기 지역구 유권자들의 경제적 이해를 가장 중요한 판단 준거로 삼았다.

의원단 내부의 논쟁에서 소수파로 몰린 베벨은 G. 폴마르, E. 베른슈타인 등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진과 손잡고 의회 바깥에서 투쟁을 시작했다. 1885년 1월 스위스 쮜리히의 망명 당원들의 결의를 시작으로 각지의 당원들이 의원단 다수파를 반대하는 결의를 제출했다. 이에 대해 의원단 다수파는 <사회민주주의자>가 당의 사실상의 지도부인 의원단의 통제를 벗어났다는 규율 문제를 들어 역공을 감행했다. 그러자 다시 각 지역 조직들이 당내 민주주의를 침해하는 의원단의 월권을 비판하는 결의를 채택했다. 그 해 4월에 들어서서야 두 세력은 타협에 도달했다. 타협안의 내용은, 식민정책과 직결되는 항로는 반대하고 그렇지 않은 항로는 보조금 규모를 줄이는 한에서 찬성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의석분포상 SAP가 이 당내 타협안을 최종 관철시킬 수는 없었기 때문에 결국에는 의원단 전원이 법안에 대해 반대표를 던지는 것으로 사태가 일단락됐다.

논쟁의 최후 결과로만 보면 이는 당내 맑스주의 분파의 승리처럼 보인다. 실제로 1880년대 말부터는 베벨이 당의 핵심 지도자로서 위상을 확고히 했다. 하지만, 타협안은 유권자들의 지지 여부를 가장 중요하게 여긴 다수파 의원들의 입장을 충실히 반영한 것이었다. 이는 아우어파, 베벨파를 막론하고 선거에서 지지표를 늘리는 것을 일상 실천의 가장 중요한 과제로 여기게 됐음을 의미했다.

또한, 이는 SAP를 지지하는 독일 노동계급 내부의 모순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했다. 독일 노동자들은 탄압법의 시련 속에서 ‘과학적 사회주의’ 이념을 열렬히 받아들였다. 하지만, 당시는 독일 자본주의가 독점자본의 형성과 제국주의 대외 정책을 통하여 세계대불황을 극복하면서 새로이 장기 성장을 시작하던 시기였다. 독일 노동자들은 한편에서는 미래에 닥칠 자본주의의 붕괴와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꿈꾸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비스마르크 정권 아래서의 경제 성장을 찬미했다. 그들의 비좁은 집에는 황제와 비스마르크의 초상이, 맑스, 엥겔스의 초상과 함께 걸려 있었다.
  
에르푸르트 강령의 모순
  
탄압법은 원래 2년 반 동안만 효력을 갖는 것을 전제로 한 한시적 법률이었다. 그러나, 원내 보수 세력은 3차례의 연장 결정을 통해 탄압법 체제를 12년간이나 지속시켰다. 새 황제가 등극하고 비스마르크가 권좌에서 물러나는 1890년 1월에야 탄압법은 그 수명을 다한다. 그리고, 바로 그 해 총선에서 SAP는 143만표(19.7%)를 득표하여 35명의 의원을 당선시키는 커다란 성공을 거둔다. 전 세계에서 최초로 사회주의 정당이 선거에서 100만표 이상의 지지를 확보한 것이다.  엥겔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탄압법의 시련을 이겨낸 독일 노동자들을 칭송했지만, 탄압법이 SAP에 남긴 상처도 만만치 않았다. 탄압법에 대한 기억은 당원들 사이에 “탄압 공포증”이라고나 할 정서가 뿌리내리도록 만들었다. “조직을 지킨다”는 것이 어느새 당의 제 일 계명이 되었다. 조직을 지키고 선거에서 착실히 표를 늘려 가면 “언젠가는” 혁명이 닥친다는 게 독일 노동자들의 ‘신앙’이었다. 대규모 옥외 집회를 지레 두려워하고, 당원 자격도 불분명했으며, 탄압법의 잔재 때문에 중앙당과 지구당을 이어줄 광역지부 조직의 건설도 미뤄졌다. 열성당원의 비율은 대개 1~2%에 그쳤다.

이런 상황에서, 증기선 보조금 논쟁을 계기로 부상한 일군의 청년 당원들이 당의 현실을 비판하고 나섰다. ‘청년파’라 불린 이들은 당장의 선거 승리와 의원단 활동이 마치 실천 활동의 전부인 것처럼 치부되기에 이르렀다고 개탄했다. 그들은 제도 정치에 종속되는 경향에 대한 반대 편향으로 제도 정치로부터의 철수를 주장했다. 청년파는 1888년 베를린 시의회 선거·프로이센주 주의회 선거에 보이콧을 주장했다. 1890년에 들어서서는 그 전 해 제2인터내셔널 첫 회의에서 결정된 메이데이 시위 계획을 파업 계획으로 발전시키자는 제안을 했다가 의원단과 충돌했다. 이들 중 대부분은 결국 생디칼리즘 노선(노동조합이 직접 혁명 투쟁에 나서야 된다는 입장)으로 경도됐고, 결국 당에서 쫓겨나 <독립 사회주의당>이라는 소규모 독자정당을 창당했다가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지고 만다.

다음 해, 에르푸르트에서 열린 당대회에서 당은 새로운 도약을 선언했다. 당명은 <독일 사회민주당(독일어 약칭 SPD)>으로 바뀌었다. 비합법 신문인 <사회민주주의자> 대신 국내에서 발간되는 합법 신문 <전진(포어베르츠)>을 창간했다. 그리고 에르푸르트 강령이라 불리는 새 강령을 채택했다. 이 강령은 당의 궁극 목표를 밝히는 전반부와, 당면 실천 과제를 밝힌 후반부로 구성되었는데, 전반부는 당 이론지 <새 시대(노이에 차이트)>의 편집장인 K. 카우츠키가, 후반부는 당시까지도 입국이 금지되어 있던 망명 당원 베른슈타인이 작성했다. 자본주의의 붕괴와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밝힌 앞부분의 내용은 당이 드디어 ‘과학적 사회주의’를 완전히 수용한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궁극 목표를 담은 전반부와 일상 투쟁 과제를 담은 후반부 사이에는 무시할 수 없는 간격이 있었다. 일상 투쟁 과제들(보통선거권, 8시간 노동, 누진세 도입, 무상의료 등)이 “자본주의 사회의 근본적 변화”라는 목표를 실현하는 데 어떠한 의의가 있으며 어떠한 전망을 갖는 것인지 전혀 밝혀져 있지 않았다. 이는 당시 SPD의 이론과 실천의 상태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다. 말로는 혁명을 주장하지만, 몸은 제도 정치에 붙박혀 있는 모습 ― 혁명은 하나의 ‘신앙’으로만 남고, 실제 관심 있는 것은 개혁 투쟁이었다. 그렇다고 개혁 투쟁에서 제대로 성과를 냈냐고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SPD는 여전히 원내에서 상대적 소수 정당이었고, 그렇다고 입법 활동 이외의 다른 투쟁 수단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민하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두 가지 편향이 나타났다. 하나는 이론 중심 편향, 혹은 이론적 기회주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당 이론가인 카우츠키였다. 그는 자본주의 붕괴와 사회주의 혁명의 필연성을 “과학적으로 논증”하는 데 치중했다. 지금 당장 당이 해야 할 바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궁극 목표와는 어떠한 관계를 가지는지 하는 문제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카우츠키가 다듬은 ‘신앙’은 당의 얼굴인 베벨을 통해 피와 살을 얻었다. 당대 독일 노동자의 전형이자 마지막까지 엥겔스의 가장 긴밀한 동지였던 베벨은 서로 분열된 SPD의 이론과 실천이 마치 통합된 것처럼 보이게 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베른슈타인의 문제제기, 수정주의 논쟁의 시작
  
또 다른 편향은 실천 중심 편향, 혹은 실천적 기회주의였다. 증기선 보조금 파동 때만 해도 베벨의 협력자였던 바이에른 SPD 지도자 폴마르가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산업화의 정도가 아직 미약하고 중·소농 인구가 많았던 남독일 바이에른 지방에서 당은 노동계급만을 지지 기반으로 해서는 총선이나 지방의회 선거에서 당장 성과를 내기 힘들었다. 이런 조건에서 바이에른 SPD는 중앙당 방침과 상관없이 자유주의자들과 “선거연합”을 추진하거나 ‘농업의 협동조합화’라는 맑스, 엥겔스의 구상에 배치되는 중·소농 정책들을 선동하는 등 독자행동을 감행하여 물의를 일으켰다. 에르푸르트 강령이 통과되기 직전에 폴마르는 이미 ‘엘도라도 연설’로 알려져 있는 두 차례의 연설을 통해 바이에른 당의 노선을 하나의 노선으로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이 연설에서 그는 에르푸르트 강령 후반부에 서술될 여러 당면 과제들 중에서도 자신이 중요하다고 본 5가지 과제(노동자 보호 확대, 결사권의 실질적 쟁취, 국가의 쟁의 개입 금지, 반독점 입법, 식료품 관세 철폐 등)를 SPD의 행동강령으로 정리하고, 앞으로 당이 이 요구들을 관철시키는 개혁 투쟁에 당 활동을 집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실 폴마르는 당의 사회주의 상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안 했다. 그는 다만 당이 솔직하게 당면 개혁 투쟁에 집중해야 하고, 그것을 성사시키기 위해서는 중간세력과 제휴하는 게 필요하다고 강조했을 뿐이었다. 그는 이러한 실천이 “사회주의 사회의 실현”과 어떤 관계를 갖는지에 대해서는 의도적으로 언급을 회피했다. 개혁 투쟁의 성과들이 과연 어떠한 사회로 나아가는 한 발자국 한 발자국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는 폴마르파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누구는 ‘사회주의’를 이야기하라고 해라. 우리는 묵묵히 우리 길을 간다.” 이것이 남독일 SPD 당원들의 기본 정서였다.

잘 알려진 베른슈타인의 문제제기, 즉 수정주의의 출발은 바로 이런 상황을 배경으로 해서만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18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카우츠키와 협력해 바이에른 SPD의 노선을 비판하던 베른슈타인은 독일 사회의 현실을 고민하면 할수록 오히려 폴마르파에 가까워지는 자신을 발견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폴마르보다 한 걸음 더 나아가길 원했다. 이론가인 그는 만약 당의 이론과 실천이 서로 어긋난다면 이론 자체를 ‘수정’하는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우직한 입장을 보였다. 1899년에 발표된 그의 저작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회민주당의 과제』(국역본: 한길사)는 베벨, 카우츠키의 정통 맑스주의를 비판하는 수많은 이론적 주장들을 담고 있지만, 그 핵심 결론은 하나로 집약된다. 자본주의가 계속 성장해가는(제국주의의 전성기인 1890년대 말이라는 역사적 상황에서는 실제 그렇게 보였다) 현 상황에서는 노동조합의 단체협상과 사회민주당의 입법 활동을 통해 개혁을 쟁취하는 것만이 유일하게 가능한 일상 실천이며 이것이 ‘곧’ 사회주의를 위한 투쟁이다. 즉, 이제 더 이상 궁극 목표라는 짐 때문에 지금 여기서 우리가 벌이는 실천에 대해 고뇌할 필요가 없다. 현재 당이 벌여나가는 개혁 투쟁이 ‘곧’ 사회주의 운동의 “전부”다. “내게는 운동이 전부다. 궁극 목표란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베벨, 카우츠키 등의 이론적 기회주의자들에 비하면, 그리고 남독일 SPD의 실천적 기회주의자들에 비하면, 베른슈타인은 차라리 정직한 것이었다. 아니, 그의 수정주의는 자본주의 안에 존재하며 활동하는 노동계급 대중정당, SPD가 처한 핵심 문제가 무엇인지를 꿰뚫어본, 영민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었다. 이론과 실천 사이의, 궁극 목표와 일상 실천 사이의 긴장을 한 쪽 항의 일방적 폐기로 잠재우려 했을 뿐이다. 이를 통해 단지 “자본주의의 극복”이라는 과제에 대한 고민을 손쉽게 지워버렸을 뿐만 아니라, 이와 함께, 개혁 투쟁만으로는 도저히 바꿔낼 수 없는 독일의 지배 체제(독점 자본가와 대지주-군부의 연합)를 과연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고민 또한 시야에서 지워버렸다.

이러한 그의 공격 앞에서 SPD 지도부의 대응은 다만 침묵과 무시였다. 당내 좌우 어디에도 베른슈타인 만큼의 용기와 안목은 없는 듯 보였다. 오직 당시 막 독일 거주 폴란드계 노동자들의 대표로 당 활동을 시작한 한 폴란드계 여성 운동가만이 사태의 본질을 직시했고, 논박의 포문을 열었다. 그의 이름은 로자 룩셈부르크. 이미 1년 전 슈투트가르트 당대회에서 이 스물 일곱 살의 이방인 여성은 유럽 노동자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이 거대한 당에 다음과 같은 당돌한 진단을 내린 바 있었다.

“우리 당에서는 극히 중요한 문제가 흐지부지되고 있습니다. 즉 그것은 우리의 마지막 목표와 일상 투쟁의 관계에 대한 이해입니다.”

주로 참고한 한글 문헌들

강신준, 『수정주의 연구Ⅰ: 노농동맹 문제와 기회주의의 발전과정』, 이론과실천, 1991
강철구,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념투쟁과 개혁주의(1890~1914)」, 서울대 서양사학과 박사논문, 1994.
김형태, 「사회주의자탄압법하의 독일사회민주당의 형성」, 고려대 교육대학원 석사논문, 1993
정대성, 「비스마르크의 증기선 보조금법안과 독일사민당의 위기, 1884~95」, 부산대 사학과 석사논문, 1996
정현백, 『노동운동과 노동자문화』, 한길사, 1991.
* 너냐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17-02-12 23:21)


prev   자본주의 사회, 노동자정당의 고뇌: 독일 사회민주당② 너냐
next   "기본소득, '좌파버전'과 '우파버전' 어떻게 다르지?" 너냐

list


Copyright 1999-2022 Zeroboa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