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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글라스의 똥차짓의 향연과 오스카 와일드의 진정한 친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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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카 와일드와 가장 친밀했으며, 또한 그 누구보다도 그를 이해해 주었던 사람은 바로 로버트 로스가 아닐까 합니다. 로버트 로스는 와일드의 채무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도움을 준 친구일 뿐 아니라, 와일드의 collected Edition(1908)을 출간하기도 한 친구입니다. 그의 아버지는 변호사이자 1869년 의회 대변인을 역임한바 있는 정치인이었으며, 그의 어머니는 2년간 캐나다의 국무총리를 지낸바 있는 유력한 정치인 Robert Baldwin의 딸이었습니다. 그 둘 모두 캐나다인이었으나 아들인 로스는 영국에서 교육받기를 원했습니다. 로스는 작고 마른 체구의 남자였으며 자비롭고 약간은 충동적이나, 이해심이 많았기 때문에 단 한번의 만남으로도 사람들을 푹 빠져들게 하는 매력을 지녔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는 다른 이의 환심을 사는 데에 탁월했으며, 어떤 이가 가치있는 사람인가를 알아보는 능력을 지녔다고 합니다. 그는 정말로 어디에서나 잘 어울렸으며,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필요로 할 때면 언제나 도움을 주었기 때문에 그가 도움을 요청할 때면 남녀를 불문하고 그를 기꺼이 도와주고자 노력했습니다. 그의 비판들은 너무 날카롭지 않으면서 담백했으며, 그의 찬사는 너무 넘치지 않으면서 따뜻했으며, 그의 회고담들은 너무 정직하지 않으면서 흥미로웠습니다. 그는 항상 자신의 친구들이 매우 좋은 이들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행동했으며, 그 역시 그들에게 매우 좋은 친구로 기억되곤 했습니다. 그의 주요관심사는 그림이었고, 그래서 그는 그림 감정으로도 매우 잘 알려져 있습니다. 와일드가 죽은 후 몇 년 동안은 갤러리를 운영하기도 했었죠.

와일드와 로스는 서로 다른 관심사를 지니고 있었으나, 그들은 알게 된지 얼마되지 않아 곧 서로를 ‘오스카’ ‘로비’라고 부르는 사이가 되었습니다. 와일드는 로스와의 대화를 통해 자신의 Intentions 를 쓰는 데에 자극을 받았으며, 로스의 세심함은 와일드의 상상력을 보충 시켜 항상 와일드에게 문학적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들은 죽을 때까지 변함없이 가까운 사이로 지냈습니다. 그들은 80년대 후반에 만났습니다. 로스가 와일드를 정확히 언제 만났는지는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은데, 종종 그가 와일드를 타락시킨 ‘첫 남성’이라고 널리 알려져 있지만 이는 사실 명확치 않습니다. 이에 대해 Borland는 ‘어떤 주장이 자주 거론된다고 해서 그것이 사실임이 입증된 것은 아니다’라고 언급하며 로스와 와일드의 관계에 대한 소문은 아직 정확하고 직접적인 근거가 없다고 말하기도 했었죠.

1887년 그의 어머니가 해외여행 중일 때, 그는 와일드의 Tite Street 집의 하숙생이 되었고 약 석 달 동안의 길지 않은 이 체류기간을 제외하고는 와일드와 그의 만남은 그 후 10년간 간헐적이었다 할 수 있습니다. 실례로 와일드는 로스를 더글러스 경에게 1893년까지 소개시켜 주지 않았죠. 1888년 10월, 그는 캠브리지의 킹스칼리지에서 공부를 시작했으나 그곳에서 불행한 1년을 보낸 후 Scots Observer에서 일하기 위해 에딘버러로 떠납니다. 불행했던 1년이란 바로 Tilly와 얽힌 일 때문인데, 이는 A.A. Tilly라는 강사가 학부생 몇몇을 부추겨서 로스를 학교 분수대에 빠트리게 하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로스는 폐렴에 걸렸고, 그로 인해 심한 고열을 얻기도 했습니다. 로스와 그의 형은 이 문제를 법정까지 끌고 가려고 했으며 와일드의 친구이자 강사였던 Browning 역시 Tilly를 해고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학생들의 증언 거부로 인해 로스는 그의 공식적인 사과를 받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습니다. 에딘버러로 갔던 그는 곧 런던으로 돌아와 Author라는 잡지의 부 편집장을 맡게 되는데, 아마 이는 비평가였던 그의 형 Alex의 추천 때문인 듯 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Arthur Conan Doyle, Rudyard Kipling, John Addington Symonds와 같은 걸출한 이들과 교류하기 시작합니다.

1893년 7월 그는 군인의 아들이었던 16살짜리 소년 때문에 큰 문제를 겪게 됩니다. 이 사건의 시작은 로스가 휴일기간 동안 Worthams를 방문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Philip Danney라는 16살짜리 소년도 그 곳에 머물고 있었는데요, 그는 그 소년을 14살 때부터 알고 있었다 합니다. 여하튼, 그는 그 소년을 런던으로 초대했고, 그 소년이 그와 머물고 있는 동안 로스는 더글러스에게 보낸 편지에 간략히 이 이야기를 하게 됩니다. 이에 더글러스는 런던으로 날아가 그 소년을 자신이 와일드와 함께 있던 Goring으로 데리고 갑니다.
Browning의 말에 따르면 그 소년은 ‘토요일에 더글러스와 잤고, 일요일엔 오스카 와일드와 보내고 또 월요일엔 런던으로 돌아가 한 여인과 잠자리를 하고 화요일이 되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그 소년의 아버지는 그 이야기를 접해 듣고 아주 격분하였으나 그의 변호사가 ‘그들은 2년을 선고 받을 테고, 당신의 아들은 6개월을 선고 받을 것’이라 하자 그냥 그 문제를 조용히 덮어버리기로 합니다. 당시 로스의 친구인 More Adey가 이 사건에 대한 법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했다고 하죠.


그 후 스위스의 Davos에서 잠시 자신의 형과 지내고 캐나다 여행을 한 후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그가 돌아왔을 땐 이미 더글러스의 아버지인 퀸즈베리 후작과 와일드의 전쟁 아닌 전쟁이 한창 고조되어 있던 참이었습니다. 더글러스는 자신의 아버지가 명예훼손죄로 고소 당해 마땅하다고 주장했으나, 로스는 와일드에게 그 문제를 그냥 무시하고 덮어버리라고 충고합니다.

퀸즈베리 후작과의 법정싸움이 와일드에게 나쁘게 진행되자 그는 와일드에게 프랑스로 잠시 도망쳐 있기를 충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도 이미 알다시피 와일드는 결국 남기로 결심하죠. 결국 와일드는 1895년 4월 5일 체포되었고, 와일드 사건에 연루될 것을 우려한 로스의 가족들은 그에게 잠시 떠나있기를 부탁했으며, 그는 그 충고를 따라 Calais로 떠납니다.

그에게 있어 이는 가장 어려운 선택이라 볼 수 있습니다. Borland도 언급했듯이 그가 그 당시 런던을 떠난다는 것은 ‘친구가 자신을 간절히 필요로 할 때 그 친구를 버렸다는 죄책감’ 때문 일 테지요. 아래는 당시의 상황을 회고한 1913년 경에 쓴 로스의 글입니다.


‘내 친지들은 내가 그 불미스러운 스캔들에 연관되어있다는 사실에 매우 고통받았다. 와일드가 체포되었을 때 내 이름이 신문지 상에 종종 언급되었고, 그로 인해 나는 내가 다니던 클럽에서 제명되기도 했다. 내 어머니께서는 만일 내가 몇 주 동안 외국에 나가 지낸다면 와일드의 재판 비용을 대주고 또한 와일드 부인이 죽을 때까지 그녀를 도와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두가지 약속은 내가 런던을 떠남으로서 모두 이루어질 수 있었다.’

와일드는 로스의 26번째 생일인 5월 25일에 유죄선고를 받게 됩니다.

1895년 12월 로스는 이탈리아에서 더글러스를 맜났고, 당시 그 둘의 관계는 와일드의 로스에 대한 신임이 두터워짐에 따라 급진적으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1897년 4월 감옥에서 풀려나기 불과 몇 주전에 와일드는 로스를 자신의 저작권 집행자로서 자신을 대신하여 활동해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는 로스에겐 큰 영광(?)이기도 하겠지만, 그가 평생 지고가야 했던 짐이 되기도 하죠.

5월 20일 감옥을 나온 후 와일드는 Dieppe에서 로스와 Reginald Turner의 환대를 받게 되고, 와일드는 로스에게 자신이 감옥에서 더글러스에게 썼던 편지(후에 De Profundis라는 제목이 붙여지죠) 사본 두개를 줍니다. 원본은 이미 더글러스에게 주었지만, 로스는 자신이 받은 사본 중 하나를 더글러스에게 또 보냅니다. 더글러스는 이에 대해 절대 받은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나, 후에 Arthur Ransome 사건 재판 때 받았다고 인정하죠.당시 그는 읽지않고 그냥 없애버렸다고 했습니다.


1900년 와일드의 죽음에 대해 로스는 친구였던 Adela Schuster에게 ‘그가 말년에 보여주었던 많은 좋은 점들 중 한가지는 바로 그가 그의 불행에 대해 결코 자신 외의 그 누구도 비난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라는 편지를 씁니다. 1901년 런던으로 돌아온 로스는 Bury Street의 Carfax Gallery를 얻어 전시회를 열기도 합니다. 특히 Max Beerbohm과 Aubrey Beardsley의 작품 전시를 열곤 했습니다.

이에 대해 더글러스는 ‘로비의 성공하지 못한 작은 그림가게’라고 놀리기도 했죠. 그러나 실제로 그 갤러리는 비평가로서, 또한 예술작품 딜러로서의 명성을 그에게 가져다 주었습니다.


1905년 로스는 더글러스가 관련된 모든 부분을 삭제한 후 De Profundis를 출간했습니다. De Profundis의 출간은 로스와 더글러스의 사이를 더욱 갈라놓았고 이는 후에 결국 법적 문제로까지 발전하게 됩니다. 1912년 Morning Post의 예술평론을 집필하는 동안 로스는 Board of the Inland Revenue의 사진과 그림에 관한 자산 평가인으로 선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1년 후 로스는 더글러스의Arthur Ransome에 대한 명예훼손 재판에 휩쓸리게 됩니다. 당시 더글러스는 랜섬이 쓴 Oscar Wilde : A Critical Study라는 책에서 자신에 대해 매우 공격적이었다고 주장했으나, 실제로 그의 이름은 책에서 언급된 적이 없다고 합니다. -_-;;

여하튼, 로스가 랜섬에게 De Profundis의 미 출간 부분을 보여준 적이 있었기 때문에 그는 랜섬의 변호사로부터 법정에서 랜섬을 변호하기 위해 그 부분을 크게 읽어 줄 것을 부탁 받았습니다. 결국, 배심원들은 랜섬의 책에서 더글러스의 주장을 뒷받침 할 만한 것이 입증되지 않는다고 판단하죠.


그는 또 한번 더글러스와 법정에서 마주치게 되는데요, 이는 더글러스의 Oscar Wilde and Myself의 출간 때문에 벌어진 싸움입니다. 그 책은 사실 Thomas Crosland에 의해 쓰여진 책인데, 크로스랜드는 Academy의 괴짜 편집장을 역임하기도 했으며 와일드를 무척이나 싫어한 사람 중 하나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로스에게 편지를 보내 와일드의 저작권 집행자로서의 권리를 포기하고 \'와일드의 명성을 회복시키기는 범죄행위(?!)\'를 한 것에 대한 공식적 사과를 요구했습니다.



또한 로스를 불명예스럽게 하고자 했던 더글러스와 크로스랜드는 로스의 성(性)적 기호를 드러내기 위해 유죄로 선고 받은 바 있는 Christopher Millard라는 남창과 연결시키는 계략을 꾸미고, 이를 위해 로스의 편지들을 훔치기 위해 사립탐정을 고용하기도 합니다.


1914년 3월, 로스는 더글러스에 대해 명예훼손을 고발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프랑스에 머물고 있었던 크로스랜드는 뻔뻔스럽기 짝이 없게도 그 고발에 맞대응하기위해 4월에 런던으로 돌아옵니다. 그러나 로스를 곤경에 빠트리고자 했던 더글러스와 크로스랜드의 계략은 법정에 서기도 전에 행정장관의 청문회에서 완전히 드러나게 됩니다. 그 남창이 감옥에서 풀려났을 때 그는 자신이 로스와 성적 관계를 가졌다는 글에 싸인할 것을 재촉받았지만, 오히려 그는 그 진술서가 거짓이라고 주장했기 때문이지요.


6월에 그 법정싸움은 시작되었으나 와일드, 로스, 밀라드(남창)의 이름은 로스의 결백에 대한 배심원의 인식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고, 결국 그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그 법정싸움이 진행되는 동안 로스는 Frank Harris의 와일드 전기 집필을 위해 그에게 도움을 주기도 했는데요, 해리스는 자신의 와일드 전기문 26장에서 로스를 ‘Devoted Friend’로 찬사함으로써 그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하기도 했습니다.


1917년 로스는 그가 매우 원했던 Tate Gallery의 이사가 됩니다. 이 기간동안은 더글러스의 괴롭힘(?) 없이 순탄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행복도 잠시, 1918년 10월 5일 로스는 잠을 자다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나고 맙니다. 그는 생전에 Jacob Epstein이 디자인한 와일드의 무덤에 자신의 재를 놓아달라고 유언을 남긴 바 있으나, 더글러스의 분노에 두려움을 느낀 그의 가족들은 더글러스가 죽은 후 와일드 서거 50주년 기념일인 1950년 11월 30일이 되어서야 그의 유언을 들어줄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와일드는 로스와 자신의 묘비명에 대해 부담 없이 대화를 나눈 적이 있는데, 당시 와일드는 자신의 매력, 유머, 천진난만함을 모두 아우르는, 자신에게 가장 알맞은 문장을 무심코 내뱉습니다. 그러나 이 문장은 묘비명에 새겨지지 않았죠.

‘우리가 무덤에 누워있을 때 최후의 트럼펫이 울리면, 자네에게 뒤돌아 속삭이겠네. ‘로비, 로비, 우리 못 듣는 척 하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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