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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poem)
 너냐  hit :  324  
풀꽃
나태주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사막
오르탕스 블루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나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끊긴 전화
도종환  

전화벨이 울렸다 수화기를 들었다
말이 없었다 잠시 그렇게 있다 전화가 끊어졌다
누구였을까 깊은 밤 어둠 속에서 아직도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가 두근거리는 집게 손가락으로
내 가장 가까운 곳까지 달려와
여보세요 여보세요 두드리다 한 발짝을
더 나아가지 못하고 넘어서지 못하고
그냥 돌아선 그는 누구였을까

나도 그랬었다 나도 이 세상 그 어떤 곳을 향해
가까이 가려다 그만 돌아선 날이 있었다
망설이고 망설이다 항아리 깊은 곳에
비린 것을 눌러 담듯 가슴 캄캄한 곳에
저 혼자 삭아가도록 담아둔 수많은 밤이 있었다
그는 조금도 눈치 채지 못한 채 나 혼자만 서성거리다
귀뚜라미 소리 같은 것을 허공에 던지다
단 한마디 전하지 못하고 돌아선 날들이 많았다

이 세상 많은 이들도 그럴 것이다
평생 저 혼자 기억의 수첩에 썼다 지운
저리디 저린 것들이 있을 것이다
두 눈을 감듯 떠오르는 얼굴을 내리 닫고
침을 삼키듯 목 끝까지 올라온 그리움을 삼키고
입술 밖을 몇 번인가 서성이다 차마 하지 못하고
되가져간 깨알 같은 말들이 있을 것이다



질투는 나의 힘
기형도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 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 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편지
윤동주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을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 긴 사연을 줄줄이 이어
진정 못 잊는다는 말을 말고
어쩌다 생각이 났었노라고만 쓰자

그립다고 써보니 차라리 말을 말자
그냥 긴 세월을 지났노라고만 쓰자
긴 긴 잠 못 이루는 밤이면
행여 울었다는 말을 말고 가다가
그리울 때도 있었노라고만 쓰자



상처입은 새는 떠나지 않는다
이용채

떠날 줄 모르는 새가 있었다

다른 새들은 다 떠나는데
유독 그 새만 남아 있었다
왜 그럴까 골똘히 생각을 하다가
그 새가 상처 입은 새라는 걸 알았다
상처 입고 날지 못하는 새라는 걸 알았다

상처 입은 새는 떠나지 않는다

내가 상처 받고 그대 곁을 떠나지 않듯이
상처 입은 사람은 상처를 준 사람을
쉽게 떠나지 않는다

그 새도 상처가 아물면 떠날 것이다
나도 상처가 아물면 그대를 떠나야 하듯이



사랑의 이율배반
이정하

그대여
손을 흔들지 마라.

너는 눈부시지만
나는 눈물겹다.

떠나는 사람은 아무 때나
다시 돌아오면 그만이겠지만
남아 있는 사람은 무언가.
무작정 기다려야만 하는가.

기약도 없이 떠나려면
손을 흔들지 마라.



절망
김수영

풍경이 풍경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곰팡이 곰팡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여름이 여름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속도가 속도를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졸렬과 수치가 그들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 것처럼
바람은 딴데서 오고
구원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오고
절망은 끝까지 그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



우울한 시대의 사랑에게 3
박현수

  아직도 기다리고 있을 것만 같다. 나의 소심 탓이려니 해도 아무래도 부치지 않을 편지를 쓰고 있을 것만 같다. 지금 생각하면 그 때 그렇게 헤어진 건 정말 잘한 일인데, 그녀는 왜 못이라도 쾅 쾅 박고 떠나지 않았는지.
  그래도 바랄 게 남았다는 건가. 상처를 건드려서라도 기억을 더금고픈 슬픈 자학이여. 아직도 나는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다.



낯선 짐승의 시간
강정

냄새로 사물을 식별하는 건 비단 네 발 짐승의 장기만이 아니다
지워진 너의 냄새가 사방 분분한 낙엽의 마지막 숨결에서 배어나온다
이 친밀도 높은 인분의 기척을 나는 인간에 대한
또 다른 전망으로 읽는다
인간이 사랑을 멈추지 않는 까닭은
이미 퇴화한 감각에 대한 질긴 향수 때문이다

기억에서 지워진 사람을 다시 지우려는 욕구 탓인지
휴일엔 동물원이나 유원지 따위가 문전성시다
몸이 쉬는 날치고
마음이 아프지 않은 적이 내게는 없다

끝을 모르는 짐승의 고요한 낮잠을 읽으며 음악을 들으면
허공에 박물관 도록처럼 펼쳐지는 이미 멸종한 생물들의 연대기
이별은 그러니까 내가 고기를 먹는 날이다
소위 인간보다 저능한 것들의 살을 씹으며
인간이기를 방면하려고 애쓰는 건
내 몸 안에서 죽지 않은 누군가의 심장이 짐짓 예술적으로 교태를 부리며
이 몸 바깥의 어떤 사물을 만지려 하기 때문이다

고기를 먹고 나서 거울을 보고
거울에 담긴 서글픈 육식동물의 눈알을 탐하며
지구 멸망의 마지막 스위치를 내리듯 수음에 몰두한다
그 순간 머릿속은 너무도 시적으로 파악해버린 현대물리학 이론의 집성장이다
시와 초가 분하게 경계를 넘으며 한 평 반 남짓 화장실 공간이
수천만 人馬가 살상된 채 까마귀 떼를 호리는
저 먼 당송 시대쯤의 격전장으로 변한다

마지막 한방울까지 토해내면 나는 인간의 정념 바깥으로 나갈 수 있을까
시공 곡률의 첨단을 제멋대로 해체하려드는 이 미련한 전념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누군가가 있다
황망해진 마음 후다닥 감추려
짐짓 다른 표정을 바꿔쓰며 코를 씽긋거리는 이 몸이
어느덧 벌써 다른 짐승의 육체,
고기 냄새를 풍기고 온 날이면 어김 없이
내 손길을 피하는 안방 고양이의 새침한 눈알 속이다
이제야 알겠다
살을 부빈 시간이 많을 수록 네가 내가 되고 나는 그 어디에도 안 보이는 바람이 되어버리던 까닭을


호수
정지용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가리지만

보고픈 마음
호수만하니
눈감을 밖에


손톱
전윤호

나 같은 얼간이에게
사랑은 손톱과 같아서
너무 자라면 불편해진다
밥을 먹다가도 잠을 자다가도
웃자란 손톱이 불편해 화가 난다
제 못난 탓에 괴로운 밤
죄 없는 사람과 이별을 결심한다
손톱깎이의 단호함처럼
철컥철컥 내 속을 깎는다
아무 데나 버려지는 기억들
나처럼 모자란 놈에게
사랑은 쌀처럼 꼭 필요한 게 아니어서
함부로 잘라버린 후
귀가 먹먹한 슬픔을 느끼고
손바닥 깊숙이 파고드는 아픔을 안다
다시 손톱이 자랄 때가 되면
외롭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이승훈

그래도 인생은 계속된다
네가 없어도 계속된다
네가 없어도 계속되는
인생은 개같은 인생이지만
개같은 인생은 계속된다
계속되는 피로
계속되는 추위
계속되는 우울
이미 죽어버린 우울이
다시 계속되고
이미 죽어버린 내가
다시 계속되고
피가 계속되고
억지가 계속되고
아우성이 계속된다
어쨌든 계속된다
계속되는 전율
계속되는 백지
계속되는 밤의 미소와
계속되는 낮의 공포와
이불의 절망과 빨래의 불안과
돈의 무게와 피로의 이력은
그래도 계속된다 인생이
불을 켜는 일이 계속되고
불을 끄는 일이 계속된다
네가 없으면 세상이
끝장인 줄 알았지
네가 없어도
인생은 계속되고
다림질이 계속되고
추억의 다림질이 계속되고
정신나간 시간이 계속된다
내가 계속된다
네가 없으니까
없는 내가 계속된다
어쨌든 인생은 계속된다


멜랑콜리아
진은영

그는 나를 달콤하게 그려 놓았다
뜨거운 아스팔트에 떨어진 아이스크림
나는 녹기 시작하지만 아직
누구의 부드러운 혀끝에도 닿지 못했다

그는 늘 나 때문에 슬퍼한다
모래사막에 나를 그려놓고 나서
자신이 그린 것이 물고기였음을 기억한다
사막을 지나는 바람을 불러다
그는 나를 지워준다

그는 정말로 낙관주의자다
내가 바다로 갔다고 믿는다


열쇠
도종환

세상의 문이 나를 향해 다 열려 있는 것 같지만
막상 열어보면 닫혀 있는 문이 참 많다
방문과 대문만 그런 게 아니다
자주 만나면서도 외면하며 지나가는 얼굴들
소리 없이 내 이름을 밀어내는 이데올로기들
편견으로 가득한 완고한 집들이 그러하다
등뒤에다 야유와 멸시의 언어를
소금처럼 뿌리는 이도 있다
그들의 문을 열 만능 열쇠가 내게는 없다
이 세상 많은 이들처럼 나도
그저 평범한 몇 개의 열쇠만을 갖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두드리는 일을 멈추진 않을 것이다
사는 동안 내내 열리지 않던 문이
나를 향해 열리는 날처럼 기쁜 날이
어디 있겠는가 문이 천천히 열리는
그 작은 삐걱임과 빛의 양이 점점 많아지는 소리
희망의 소리도 그와 같으리니


살다보면
이정하

살다보면,
떠나보내지 말아야 할 것을
떠나보낼 때가 있다.

사랑하면서도
사랑하지 않는 것처럼
말해야 할 때가 있다.

허기져 죽는데도
입에 물 한 방울
들어가지 않는 때가 있다.

살다보면,
살다보면,
살아 있는데도
죽어 있는 때가 있다.


위로의 방법들
서안나

나는,
떠나간 당신에게서
직유법으로 새처럼 날아오를 수 있었다

자고 일어나도 어두웠다
낮인가 했더니 밤이었다
먼 나라의 국경에서 전쟁이 반복적으로 터졌다
전쟁은 총과 피와 대포를 끌어들여 비극의 이미지가 되었다
죽은 자만큼 태어난 아이들이
국적 없는 거리에 보조관념으로 흩어졌다

사랑이라 했더니 이별이었다
사랑은 혁명처럼 붉은 깃발을 흔들며 역설적으로 사라졌다
우리는 헤어지는 자들을 은유로 위로했다
눈물이 환유적으로 흘렀다

우리는 원관념에서 너무 멀리 걸어와 버렸다
죽은 자들을 다시 불러내어 과장법으로 기록하였으며
죽은 자들은 스스로 별이 되어 상징으로 부활했다
우리는 이미 재생의 은유구조를 알아버린 자들이었다

한 사내가 피를 흘려
모든 죄를 껴안아 용서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틈이 수사법으로 채워졌다

우리는 너무 많은 위로의 방법을 알고 있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리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 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 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아주 먼 데서 지금도 천천히 오고 있는 너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데미안

누구나 이런 어려움을 겪는다.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인생의 분기점이다. 자기 삶의 요구가 가장 혹심하게 주변 세계와 갈등에 빠지는 점, 앞을 향하는 길이 가장 혹독하게 투쟁으로 쟁취도어야 하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들의 운명인 이 죽음과 새로운 탄생을 경험한다. 삶에서 오로지 한 번, 유년이 삭아가며 서서히 와해될 때, 우리의 사랑을 얻었던 모든 것이 우리를 떠나가려고 하고 우리가 갑자기 고독과 우주의 치명적인 추위에 에워싸여 있음을 느낄 때 경험하는 것이다.  그리고 아주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이 절벽에 매달려 있다. 돌이킬 수 없는 지나간 것에, 잃어버린 낙원의 꿈에, 모든 꿈 중에서 가장 나쁘고 가장 살인적인 그 꿈에 한평생 고통스럽게 들러붙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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